[감성터치] 아버지의 우산
십여 년 만에 또 이러고 있다. 대학병원 의자에 앉아서 머리 위 대형 모니터에 아버지의 이름이 떠오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왔지만 처음 와 본 병원의 첫 진료라서, 아버지와 나는 좀 헤맸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물어보고, 번호표를 뽑고, 수납하고, 다른 병원에서 받아온 검사 결과지와 CD를 등록하고, 대기했다. 한참 후 만난 의사는 수술이 힘든 경우라며 다른 과로 옮겨서 진료를 받아보라 했다.
우리는 다시 원무과로 가서 번호표를 뽑고, 당일 진료 접수를 하고, 다른 과의 의사를 기다렸다. 집을 나선 지, 네 시간째였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마침표는 나오지 않는 무한 ‘그리고’의 상태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엄마와 다른 대학병원에 다니던 때가 떠올라 심란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썼다. 수술이 힘들 것 같다는 말 때문인지 옆자리의 아버지는 더욱 긴장한 듯했다. 음료도 마다한 채 시무룩하게 앉은 아버지 모습을 보니 온몸이 축축하게 젖는 기분이었다. 큰 병원 가보라는 말을 듣고 혼자 씩씩하게 병원을 찾아가 여러 검사를 받았을 아버지가 결국 그러고 있어서. 아내를 요양병원에 보낸 아버지의 서사가 이렇게까지 극적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지금 우리에겐 주목받지 않아도 소소하게, 명랑하게, 길게 연재되는 이야기가 필요한데. 좀 외로웠다.
둘이 앉은 의자는 병원 로비의 넓은 공간을 향해 있었다. 사십이 년 인생에 아빠와 단둘이 이리 오래 있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기운을 주려고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노조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로비에 모여들었다. 보건의료노조 총파업 이야기가 나오던 시기였다. 그러고 보니 접수증을 받던 각 과 간호사들도 노조가 외치던 구호를 명찰처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발언하고 구호를 외쳤다. 음악을 켜기도 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자신이 했던 노조 활동 이야기였다. 중년의 아버지는 대학병원 청소 일을 오래 했다. 청소 반장이었던 시절, 그곳 노조에서 활동하며 이룬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면서 아버지는 쾌활해졌다. 그래 아버지, 우리에겐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데.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이야기. 함께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 그리하여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 소설가 딸도 이럴 땐 다, 소용없다. 진료를 받고 나오니 비는 그쳤다. 아버지는 그날 긴 우산을 들고 왔다. 편의점에서 파는 투명우산이었다. 우산은 병원 안을 분주히 이동하던 나와 아버지의 두 손을 오갔는데 그때마다 우산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늦은 점심으로 국밥을 먹고 밖에 나오니 비가 다시 쏟아졌다. 서로 가야 할 곳이 반대 방향이라 식당 앞에서 우리는 인사했다. 아버지가 우산 손잡이의 버튼을 눌렀다. 비로소 펼쳐지는 저 투명한 지붕! 거추장스러운 것도 제때를 만나면 소중해진다.
식당 처마 아래에 서서 먼저 떠나는 아버지의 우산을 다시 봤다. 이은주 시인의 시 ‘우산(雨傘)’이 떠올랐다. ‘우산 속에는 사람들이 참 많이도 모여 살지/이마를 부비며 서로를 받쳐주는 일에/ 깃발을 걸고 무동까지 타면서 말이야 //먹장구름 속일수록 더 단단히 모여들지/이렇게 우리가 우산처럼 모여 산다는 것은/다함께 수직에 맞서 둥글어지는 일이야’(긴 손가락의 자립, 신생, 42쪽).
아버지의 삶이라는 우산 속에서 아버지와 연결된 사람들을 생각했다. 최근 아버지의 병을 알고 난 뒤, 동네 친구들은 아버지를 챙겼다. 과채 주스를 직접 갈아 주거나 공원 산책을 함께 했다. 내가 모르던 시절까지 거슬러가면 아버지 우산 속 사람은 무척 많을 것이다.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는 ‘단단히 모여’든 사람들이 만든다.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잠시 빌었다. 아버지가 외로워지는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우산 속 사람들이 꼭 나타나는 이야기가 생기길. 물론 나부터 누군가의 우산에 연결되어야 하겠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쓰기만 할 게 아니라, 사람 살리는 이야기를 살아내는 사람이 되고 볼 일이다.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둥근 이야기가 팟, 하고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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