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우연, 예술 안에서 운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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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등장한 아방가르드는 유리된 예술을 삶 속에 되돌리고 그렇게 예술을 통해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목적이 있었기에 전위(前衛)로 불렸다.
그러나 기존 관점에서 익숙지 않은 그들의 작업은 오히려 예술을 난해한 것으로 만들었고 결국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이들은 기존 예술의 닫힌 양식들을 활짝 열고 일상에 존재하는 우연적인 것들을 담는 방식으로 예술을 삶에 침투시키려고 했다.
우연에 스스로를 열어놓는다는 것은 삶의 불확정성을 수용하는 것인데 일부러 우발적인 사건을 유도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동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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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등장한 아방가르드는 유리된 예술을 삶 속에 되돌리고 그렇게 예술을 통해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목적이 있었기에 전위(前衛)로 불렸다. 그러나 기존 관점에서 익숙지 않은 그들의 작업은 오히려 예술을 난해한 것으로 만들었고 결국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나 예술을 삶 속에서 맞이하려는 그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기나 자전거 바퀴가 미술작품이 되고 4분33초의 소음이 음악이 되던 시기, 즉 1950~60년대 현대예술이 '네오 아방가르드'로 불린 이유다. 이들은 기존 예술의 닫힌 양식들을 활짝 열고 일상에 존재하는 우연적인 것들을 담는 방식으로 예술을 삶에 침투시키려고 했다. 다양한 코드를 무작위적인 조합으로 연결하기, 자연적 질료나 일상의 오브제를 그대로 사용하기, 즉흥적 움직임 변용하기 등은 음악, 미술, 무용 등 전통적으로 '닫힌 작품'을 추구한 예술이 도입한 '우연으로의 열림'이었다.
영화예술에서 우연성은 다른 예술에서 만큼의 파격은 아니다. 사실 영화는 항상 살짝 열려 있었다. 영화는 카메라 예술이라 영화이미지는 벽에 걸린 시계나 책상 위의 볼펜처럼 카메라가 '거기', 즉 우리의 일상이기도 한 현실 속에 함께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카메라는 자연과 물리적 현실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을 그대로 기록하기 때문에 최종 이미지를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 그렇게 일상과 맞닿아 있는 만큼 영화의 리얼리즘은 다른 어떤 예술의 리얼리즘보다 자연스럽다. 그러나 영화의 리얼리즘은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그대로 예술이 될 수는 없다. 영화는 현실이라는 재료에 연출과 연기를 더하고 그렇게 촬영된 이미지를 창조자의 의도에 따라 절묘하게 편집한다. 그렇게 실존세계의 독창성을 유지한 채 '예측불가능한 것들'을 통제하고 우연성의 껍질을 떼어냄으로써 창조적인 유사현실이라는 닫힌 작품을 만들어낸다. 영화학자 노엘 버치는 영화를 '우연에 맞선 투쟁'으로 묘사했다('영화의 실천'). 오늘날 CG기술로 사후보정이 더욱 정교해진 것도 이러한 투쟁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영화는 세상의 우연한 이미지들을 닫힘으로 포섭하지만 여전히 열림의 형태를 가장한다.
1950년대 열린 예술의 흐름이 영화계에도 영향을 줬다. 시네마베리테(cinema verite)는 우연을 통제하는 것을 거부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연을 만들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공격적인 질문들을 던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사실 우연이 자연 속에서 스스로의 인과관계를 통해 발생한다면 여기서 만들어진 것은 '우발성'이었다. 우연에 스스로를 열어놓는다는 것은 삶의 불확정성을 수용하는 것인데 일부러 우발적인 사건을 유도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동에 가깝다. 오늘날 리얼리티 TV가 자연스럽지 않고 자극적이라 느껴진다면 바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 일상의 우연과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기대한 손님의 방문은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때와 장소, 예기치 못한 만남이 나의 일상을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운명적인 우연이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타자를 마음에 들이는 사랑, 불가지(不可知)의 모험에 열린 예술. 이때 느끼는 두려움과 기대, 혹은 설렘의 이중주는 불안을 야기하지만 우리는 불안을 통해 살아 있다고 느낀다. 쇠렌 키르케고르가 불안을 부정적인 증상으로 단정하기보다 미지의 것, 새로운 것의 탄생을 예견하는 창조성의 징후라고 평가한 이유일 것이다.
기대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려면 우리는 문을 열어놓는 데 익숙해야 한다. 예술과 사랑은 삶의 불확실성을 끌어안음으로써 운명으로 다가온다.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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