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로 세탁되고 백인에게 표백된 과학 말고 ‘진짜 과학’
10살 때 이론물리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한 흑인 여자아이가 있었다. 미혼모인 엄마는 사회운동가였다. 어릴 때부터 ‘흑인의 힘’과 자부심을 듣고 자란 아이는 그만큼 차별 또한 일찍 겪었다. 아이는 우주가 궁금했고, 우주를 정확하게 다루는 수학이 궁금했고, 공부를 잘해서 하버드대학에 들어갔다. 길거리와 달리 강의실에서만큼은 수학과 차별이 따로 떨어져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물리학과 수학 강의실은 ‘우주론의 현장’인 동시에 ‘사회적 현장’이었다. 아이는 인간의 차별이 우주까지 확장되는 광경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과학은 사회와 분리된 진공상태에서 나오지 않는다.”
찬다 프레스코드와인스타인은 입자우주론 학자다. 우주의 역사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들을 수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우선, 스스로 ‘흑인 에이젠더 여성’이라고 밝히는 데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지정성별 여성의 몸을 갖고 있지만 성별 이분법에 비순응하는 ‘에이젠더’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수학으로 우주를 이야기하는 그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음유시인이자 구전역사가인 ‘그리오’를 자처한다. 미국 뉴햄프셔대학 물리학·천문학과 교수이자 여성학·젠더학과의 핵심 교수로서 그는 이론우주론 분야의 첫 흑인 여성 교수가 됐지만 첫 ‘그리오’는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선조를 비롯한 모든 공동체에는 우주를 설명하는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인종과 성별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의 지적 성취를 의심한다면, 오해다. 프레스코드와인스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 과학기술 주간지인 <뉴사이언티스트> 칼럼니스트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저명하다고 평가받는 과학저널 <네이처>가 선정한 ‘2020년 과학 형성에 도움을 준 10명’에 꼽히기도 했다. 백인 남성이 주류인 과학계에서 흑인 에이젠더 여성으로 그 ‘자리’까지 가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서설이 길었다. <나의 사랑스럽고 불평등한 코스모스>(휴머니스트 펴냄)는 제목부터 불세출의 과학커뮤니케이터이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떠오르게 한다. 세이건을 비롯한 백인 남성의 주류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은 우주의 숭고함과 경외감을 인류에게 가르쳤다. 저자는 다른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본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은 사실 불완전하며, 서구 백인 남성이 만든 훈련 방식을 벗어나야 비로소 완전한 상태가 되리라 강조한다. 입자물리학은 핵물리학의 하위 분야에서 시작했고, 저자는 세계를 핵무기 시대로 안내한 오펜하이머가 되거나 조폐국장을 하며 화폐 위조범들을 사형시키고 고문하길 즐겼던 뉴턴처럼 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지적 호기심을 품었던 흑인 여성들이야말로 뉴턴만큼 훌륭한 지적 조상이라고 말한다.
과학은 인종차별, 성차별, 식민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저자는 과학 용어부터 차별의 시선이 스며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이론물리학에서 각 입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색상에 비유해 설명하는 ‘양자 색역학’을 보자. 사실 입자들의 상호작용은 색깔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백인이 ‘유색인종’이라는 말을 쓰던 시기에 발달한 명칭이었을 뿐이다. 우주에 가득한 미지의 물질인 ‘암흑물질’ 또한 ‘보이지 않는 물질’ ‘투명한 물질’ ‘무색 물질’ 따위의 이름이 붙어야 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암흑물질은 검은색과 무관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암흑’이라는 표현에 저자가 동의하는 우주 가설은 ‘블랙홀’이 유일하다. 블랙홀은 빛을 흡수하고 방출하지 않는다.
원주민의 지식을 수집해 제국으로 가져가 ‘과학 지식’이라 부르는 형태로 통합한 수많은 사례가 있다. 권력을 구조화하는 체계로서 인종 개념은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피부와 머리카락에서 볼 수 있는 ‘유멜라닌’이 적은 개체(백인)는 많은 개체(흑인)에게 오랫동안 잔혹한 짓을 일삼았지만 흑인 또한 초신성이 폭발한 잔해에서 만들어진 동등한 별의 자손이다. 과학계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며 저자는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식민주의, 군국주의와 손잡는 과학 문화에 동조하지 않는 책임을 지려고 한다. 인류가 세상 끝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를 여기로 인도한 사건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사고방식과 관계맺기가 중요하다. 급진적 관점은 마지막 희망이자 선물일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한 과학서적이나 페미니즘 에세이라고 좁혀 말할 수 없다.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쿼크부터 광대한 우주까지 이론물리학, 양자물리학, 우주생물학 등 많은 이론을 검토하면서 인종과 성별정체성 그리고 우주 과학이 만나는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도발적이면서도 가장 날카로운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입자우주론과 물리의 세계를 다루는 책의 앞부분은 물리학 서적을 탐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뒤로 갈수록 노동계급 출신 흑인 성소수자 여성으로서 저자의 체험과 목소리를 강하게 만날 수 있다. 그의 ‘과학 일대기’ 속엔 어느 과학자에게 입은 강간 피해도 포함됐다. 강간은 욕망에 관한 것이라지만 소유권에 관한 것이고, 과학은 호기심으로 발전한다지만 실제로는 통제에 관한 것이었다. 한 파티에서 자신을 강간했던 남자를 본 뒤 그는 책에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재발하고 실패자처럼 느껴졌지만 그는 방정식 적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이렇게 소회를 남겼다. “나는 계속 나아가고 있다.”
자유를 얻는 방법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다. 예술가 샤네큐아 게이의 말을 빌려 저자는 쓴다. “자유란 다른 많은 사람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과 같다.” 이 시대의 자유는 진정 누구에게 있는가 생각해보게 한다. 침묵은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다던 오드리 로드의 가르침을 저자는 동료 과학자와 독자에게 다시 한번 전한다. 김명남 번역가는 추천사에 “다른 과학책이 모델하우스라면 이 책은 현실의 과학이다”라고 썼다. 그 말이 맞는다. 과학의 실체를 보여주는 진짜배기 과학책이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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