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 홍범도, 이것은 역사논쟁이 아니다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은 결국 역사논쟁이 아니라 역사를 재료로 삼은 정치투쟁이다. 논쟁 와중에 어디에도 새로 발견한 사료를 보니 이렇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이가 없다. 과거 자료를 다시 검토해보니 이런저런 해석이 가능하다거나, 아니면 대립하는 해석적 관점들 중에서 한쪽이 이런저런 이유로 타당하다는 주장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홍범도가 누구를 왜 만났고, 무슨 당적을 지녔냐는 이야기 끝에 흉상 이전을 말하는데, 시민은 어린 육사 생도들과 함께 갑갑할 뿐이다.
얼마나 갑갑하면 국방부 정례브리핑 중에 나온 기자의 질문을 가장해 힐난한 목소리가 시원하다는 세평이 있을까. 정부 공보자료를 놓고 빨치산의 어원과 용례를 정리해 주는 기자의 질문 아닌 질문을 듣고 있자니, 그도 참 어지간히 답답했구나 싶다. 그나마 보람된 일이 있었다면 각자 답답한 마음에 1920년대 극동공화국에서 홍범도 장군을 포함한 독립운동세력의 활동에 대해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다. 뭘 알아야 한마디라도 얹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나도 1920년 니콜라옙스크 사태의 공격자와 피해자는 누구인지, 당대 독립군 내 공산주의 계열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반목하는 동안 민족계열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결국 1921년 이르쿠츠크파의 손을 들어준 칼란다리시빌리는 자유시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참변을 앞두고 홍범도와 지청천은 왜 그리 선택했는지 주마간산으로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더 모르겠다. 모호한 증언, 파편적 사료, 선택적 번역은 연구자의 신념과 가치를 반영한 서술 속에서 하나의 매끄러운 이야기로 통합된다. 그러나 앞뒤가 분명해 보이는 사건일수록 과연 그런 이유에서 벌어졌을까 싶고, 선악이 명백해 보이는 인물의 동기나 행동일수록 과연 그런 의도였을지 의심스럽다. 때는 1920년대, 장소는 흑룡강 너머 극동공화국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외적이 추격하고, 누가 진정한 동맹인지 알 수 없고, 동포의 군대가 이념과 파벌로 나뉘어 다투는 대혼란의 한 가운데 있다. 자신과 부하는 물론 동족의 운명을 시험하는 선택에 내몰린 독립군 장군들은 지금이라도 권총을 뽑아들고 박차고 나서야 옳은지 고뇌하고 또 고뇌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제의 진위를 놓고 벌이는 다툼이라면 학술적 탐구와 논쟁을 계속하면 된다. 먼저 참여자들이 남긴 기록과 자취를 찾아 나서야 한다. 자료에 근거한 본원적 주장과 검토가 교차하면서 1920년대 만주 너머서 벌어진 사태의 진위에 대해 믿을 만한 가설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때론 불완전한 자료와 설익은 해석에 휘둘려 오류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진본 자료와 공정한 해석을 추구한다면 실체적 사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 인물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놓고 벌이는 다툼이라면 달라진다. 주요 인물의 구체적인 동기와 행위를 확인해 줄 결정적 증거는 영영 발견할 수 없을지 모른다. 동기와 행위의 일관성, 타당성, 합목적성을 검토해야 하는데, 그전에 평가자들 간에 평가 잣대에 합의하지 못하면 덧없다. 실로 이 잣대에 대한 합의야말로 정치가 책임질 일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희비극은 우리 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평가하는 데 필요한 잣대에 당분간 합의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좌절감을 동반한다.
정녕 물어야 할 질문은 따라서 이것이다. 국가방위에 헌신해야 할 육군의 정예장교를 육성하는 교육의 장을 앞에 두고 왜 이런 저열한 정치투쟁을 벌이나. 왜 평가 잣대에 대한 합의가 없이 애매한 잣대를 강요하는 일에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용하나. 정치투쟁의 본안에 들어가서도 각자 할 말들이 있겠지만, 먼저 이 희비극은 역사논쟁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점부터 분명히 하고 싶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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