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칼럼] 동맹의 굴레, 과학의 구멍, 나라 죽이기
올해 8월은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전쟁이냐 평화냐, 멸종이냐 기후정의냐, 불평등 심화냐 민생안정이냐의 갈림길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전환시대의 요구를 거슬러간 ‘반동적 역류(逆流)의 달’로 기록될 것이다.
한·미·일 정상이 만나 ‘캠프 데이비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으로 세 나라는 중국을 겨냥하는 군사동맹으로 가는 길을 내디뎠다. 한·미·일 정상은 공동의 이익과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적 도전·도발·위협에 대해 서로 ‘협의’할 것을 공약했다. 이어 인도·태평양 지역과 그 너머를 협력 공간으로 호명하고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 등을 언급하며 역내 평화와 안정을 악화시키는 행동으로 중국을 특정했다. 여기서 ‘협의’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 협의 공약으로 한국은 대만 문제나 남중국해 영토분쟁 등에서 미국·일본의 공동대응 요구에 응해야 하는 실질적 의무를 지게 됐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번 합의를 동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윤석열 정부가 눈이 멀어 미국이 내세우는 허울 좋은 가치동맹(실체는 미국 국익 보호)의 허상에 갇힘으로써 동북아의 신냉전 대결구도가 심화되고, 한반도 평화문제의 해결과정이 미·중 간 패권다툼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우리는 동맹의 굴레를 뒤집어쓴 섣부른 선택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할 판이다. 마침내 일본 도쿄전력이 방사능 오염수 해양방류에 돌입한 것은 거의 정해진 수준이었다. 한국의 윤석열 정부가 친일정부를 자임하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 제3자 변제라는 해괴한 해법(일본 피고 기업의 책임을 묻지 않고 한국 내부에서 자체 해결)을 제시함으로써, 사실 오염수 방류에 대한 큰 걸림돌도 제거된 꼴이었다. 정부는 일본의 무책임한 오염수 방류 행위를 적극 지지·동조했다. 미국이 배후 펌프질을 했고 윤 정부는 기대 이상으로 호응했다.
일본 정부는 뻔한 꼼수를 부려 방사능 오염수를 ‘처리수’라 부른다. 이에 발맞추어 한국 여당도 처리수 또는 오염 처리수로 부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도쿄전력은 ‘알프스(ALPS)’라고 하는, 일본제 다핵종(多核種) 제거 설비를 통해 방사성 물질 함유 오염수를 정화한 뒤 물에 희석해 바다로 내보낸다. 알프스로 처리하고 태평양 물과 섞으면 안전하다는 게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정부와 여당은 일본의 오염수 방류에 대한 반대 여론과 시민적 항의 운동을 과학을 무시하는 ‘괴담’이라 몰아붙이고 ‘괴담 자료집’까지 배포했다. 일본 입장에선 자국 안에 지하매립을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해양방류함으로써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비용도 엄청 줄일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을 들먹인다. 하지만 한국인과 아시아인들, 지구 시민들, 차세대의 입장에선 삶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것은 정당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 문제다. 첫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부터 그들은 위험을 감추면서 과소평가해 왔다. 처음부터 신뢰를 잃었다. 둘째, 알프스를 믿으라지만 고장 없이 작동한다는 전제가 의심스럽다. 1~2년도 아니고 30년에 걸쳐 방류가 진행될 예정인데 많은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고장이 나도 은폐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삼중수소는 알프스로 걸러지지 않는데도 별다른 조치 없이 방류되며, 향후 농도가 높은 오염수가 방류된다. 넷째, 이미 원전사고 직후 세슘이 포함된 오염수가 바다로 대량 방출됐고, 원전 인근 어류에서 기준치를 훨씬 넘는 세슘이 검출됐다.
과연 무엇이 괴담이고 무엇이 과학일까? 나는 과학을 믿지만 맹신하지 않는다. 과학도 오만을 버려야 하며 열린 자세로 시민과 숙의를 거쳐야 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태가 주는 생생한 교훈이 있다. 첫째, 과학에도 심각한 구멍과 위험이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은 과학의 확증편향을 의심해야 한다. 둘째, 정치가 과학의 이름으로 진실을 덮는다. 과학 자체가 오염되어 있고 과학의 이름을 빌린 괴담이 있다. 도쿄전력 방사능 오염수는 결코 안전하게 처리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안전한 처리수가 아니라 여전히 방사능 위험이 내장된 오염수다. 그 위험수가 해양투기됐고 앞으로 30년 또는 더 오래 투기된다.
유난스레 사건·사고가 많았던 8월의 반동적 역류는 육사 교정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사태로까지 불똥이 튀었다. 그 자리에 새로 백선엽 흉상을 세운다고 한다. 독립영웅을 지우고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기린다니, ‘역사 거꾸로 세우기’와 ‘나라 죽이기’가 따로 없다.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는 논리라면 남로당 조직책을 지낸 박정희의 기념물도 모두 치우는 게 앞뒤가 맞지 않을까? 참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2년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한 바 있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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