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정치에 큰 기대 말라, 그러나 지치지도 말라
미래를 주문했는데 과거가 배달돼 왔다. 태국 시민들은 분명 군부 정권을 끝내기 위해 전진당(MFP)에 표를 던졌는데, 석 달이나 시간을 끌다가 ‘짠’ 하고 나타난 정부는 도로 군부연합이었다. 전진당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 외에는 공통점 하나 없는 나머지 정당들이 똘똘 뭉쳐 자기들끼리 연립정권을 꾸리는 바람에 결국 전진당은 총선에서 승리하고도 야당이 되고 만 것이다.
지난 5월 열린 태국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전진당의 승리는 여러모로 사건에 가까운 일이었다. 2020년 군부 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태국 시민들은 ‘세 손가락’ 시위가 무력 진압을 당하자 3년 가까이 마음속으로 칼을 갈아왔다. 너희가 힘으로 우리를 누르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무기인 투표로써 너희를 심판하겠다고 말이다. 이들은 그 각오를 행동에 옮겼다. 왕실과 군부가 지배해온 태국 사회에서 군주제 개혁과 징병제 폐지 등을 공약으로 내건 전진당이 제1당이 되는,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구시대의 기득권 세력은 허울뿐인 민주주의 제도를 악용해 그 심판조차 피해갔다. 지금 태국 시민들은 “이럴 거면 도대체 왜 선거를 치른 건가”라고 묻고 있다. 이런 결과를 예견한 듯 ‘세 손가락’ 시위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네띠윗 촛띠팟파이산(27)은 총선을 앞두고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2020년 이후 한동안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 나라에선 살 수 없다’며 태국을 떠나려는 경향이 있었다. 정치권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 그렇다. 정당과 정치인에 너무 의지하다 보니까 금방 좌절하고, 결국 그들이 이뤄주지 못한 민주주의 자체를 포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전진당의 집권 실패는 역설적으로 좌절과 동시에 희망을 보여줬다. 특히나 한국의 정치 문법에 익숙한 내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에 가까웠다. 상원의원 250명 모두 군부가 지명한 인사들로 채워진 태국 의회 구조상 전진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총선 승리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군부와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나는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가 결국에는 모자란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군부 계열 정당을 포섭하려 시도하거나, 개혁적인 공약을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일단 집권은 하고 봐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원칙만 고집하다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한국의 두 거대 정당이 늘 내세우는 명분 아닌가. 승리를 위해 위성정당까지 만드는 ‘꼼수’를 부렸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 전진당과 마찬가지로 군부 통치를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제2당이 된 프아타이당은 애초의 약속을 저버리고 집권을 위해 군부와 손잡았다. 그러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프아타이당은 집권에 성공했고 전진당은 실패했다. 그러나 피타 대표는 “우리가 이겼다”고 싱가포르 매체인 CNA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오늘날 태국의 민주주의는 선거일에 국한돼 있다. 투표가 끝나자마자 정치는 ‘카드 게임’이 되고, 정치인 다수는 국민의 신뢰를 배반할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정치는 카드 게임이 아니라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다.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가 뭘까. 총리가 되려고? 아니다. 내 최종 목표는 태국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고, 총리가 되는 것은 그것을 위한 한 단계에 불과하다.”
피타 대표는 지난달 22일 태국 의회에서 프아타이당의 후보가 차기 총리로 선출되는 모습을 “후회 없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는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고 믿는다. “정치는 마라톤이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나에게는 오랫동안 뛸 수 있는 체력이 있다.”
오랫동안 뛸 수 있는 체력은 뚝심 있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유권자인 시민에게도 필요하다. 정당과 정치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라고 했던 네띠윗은 이렇게 강조했다. “신뢰할 수 있는 정치적 단체들이 없다 보니 민주화운동에 대한 피로감이 빨리 찾아오는 것이 문제다. 정치가 일상화됐다면 피로감을 느끼지 않고 민주화를 이어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네띠윗의 말은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다. 10년 후퇴한 줄 알았더니 ‘홍범도 장군 빨갱이론’까지 들먹이며 40~50년 퇴행해버린 윤석열 정권과, 개혁을 부르짖더니 스스로 개혁 대상이 돼버린 민주당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 정치에 좌절했는가. 지치지 말라. 우리에게도 마라톤 체력이 필요하다.
정유진 국제부장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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