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기재돼야 할 다양한 가족의 진실
지난해 11월24일 대법원은 11년 만에 판례를 변경해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도 성별 정정을 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다만 대법원의 결정 이전에도 하급심에서는 몇 차례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을 허가한 사례는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트랜스젠더인 부모가 성별 정정을 한 경우에 법적 관계는 어떻게 될까. 자녀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이렇게 표시된다. 성별 여성, 관계 부 또는 성별 남성, 관계 모. 부모의 성별은 바뀌지만 부모로서의 관계는 안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는 현재 ‘남성인 어머니’와 ‘여성인 아버지’들이 존재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여성 부모가 탄생했다. 지난 8월30일 딸 ‘라니(태명)’를 낳은 김규진·김세연 부부이다. 둘은 2019년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했고, 같은 해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해 12월 벨기에의 한 난임병원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다. 출산을 앞두고 이루어진 베이비샤워 이름이 ‘대한민국 저출생 대책 간담회’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라니의 임신과 출산은 그 자체로 기존의 혼인과 가족 제도에 대해 던지는 사회적 외침이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응원과 축복을 받으며 지난달 30일 새벽 라니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병원 스태프분들이 저와 제 와이프를 차별 없이 부부로 대해줬는데 이게 바로 ‘라니’가 살아갈 세상일 거라고 생각한다.”
김규진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같이 이야기했다. 실제로 병원에서 둘의 일은 특별하지 않았고, 서류에도 서로의 관계가 배우자로 작성되기도 했다. 사회 전반으로 보더라도 이러한 인식은 점차 확대될 것이다. 올해 7월 발표된 한국리서치의 ‘가족인식조사’에 따르면 연령대가 낮을수록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수용도가 높았다. 가령 18~29세 사이에서 ‘동성가족도 정상가족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응답은 56%였다. 지난 5월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20대의 64%, 30대의 53%가 ‘동성혼 법제화’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비록 아직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일부 존재하기도 하지만, 라니가 자라날수록 세상은 점차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문제는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법 제도이다. 앞서 성별 정정의 결과로 두 여성인 부모가 만들어질 수 있다 했지만, 출산을 통해 이러한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지지는 못한다. 동성혼이 법제화되어 있지 않고 동성 부부와 자녀와의 관계도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라니는 법적으로는 김규진씨의 미혼 자녀일 뿐이다. 김세연씨는 배우자로서도 부모로서도 법적인 권리를 인정받을 수 없다.
옛 호적, 현재는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되는 개인의 법적 신분에서 주요한 원칙은 ‘진실에 부합하는 기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족관계등록법은 기재사항에 착오나 누락이 있으면 이를 정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역시 이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두 부부와 그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세 사람이 한 가족으로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되지 못하는 상황은 이러한 원칙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는가. 서류가 기재해야 하는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다행히 법 제도에서도 변화는 이뤄지고 있다. 올해 4월 용혜인 의원이 생활동반자법을, 5월에는 장혜영 의원이 혼인평등법, 생활동반자법, 비혼출산지원법의 가족구성권 3법을 발의했다. 그럼에도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동성혼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고 생활동반자법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국가가 해야 할 것은 함께 돌보며 살아가는 이들이 차별 없이 권리를 보장받는 것일 뿐이다. 동성혼을 법제화하고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라니의 출생을 축하하며, 다양한 가족이라는 진실이 이제는 등록되고 기재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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