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희의 아이러니] 역사적 행위의 미적분
역사·정치 평가의 올바른 기준은
공과를 보고 중심 잡는 중용의 길
더 살 만한 나라가 되려면
의견의 중도 수렴 구조 만들어야
우리는 그것을 못해 진통 겪고 있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이라는 책이 있다. 평범한 놀이공원 정비공이 전쟁의 상처를 안은 채 자신의 생을 무의미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는 천국에서 이전에 자신이 알았거나 몰랐던 다섯 사람을 만나면서,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과거를 물리적으로 돌이킬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던 과거의 사실과 의미가 드러나면서 완전히 다른 내러티브로 재구성될 수는 있다. 그렇게 부활한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규정한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삶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E H 카아의 널리 알려진 이 문장은 그걸 정식화한 것이다.
“역사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하지만 역사는 점잖은 대화만이 아니라 치열한 정치적·상징적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에서 돈과 권력과 의미를 두고 경쟁하는 세력들은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로 쓰고자 한다. 역사적 사실은 더 발견되기 마련이고, 지금의 현실은 역사를 바라보는 새 관점을 주기 때문에, 역사가 나날이 다시 쓰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이 역사를 더 정확하고 섬세하게, 더 높은 차원에서 인식하게 한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문제는 그것이 기억의 영토를 둘러싼 정치적 소모전이 되는 경우다.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소련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게 초점인데, 역사가 질풍노도처럼 달리던 시대는 그 시대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20세기는 이념 과잉의 시대로서 역사를 급진전시켰으나,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을 안기기도 했다. 어떤 지향을 이념화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초심을 잃고 이념에 매몰되면 파국이 일어난다. 스탈린주의, 문화대혁명, 킬링필드, 옛 소련의 몰락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 관찰한 후대가 그 이전 어떤 인간의 행위를 역사적·윤리적으로 거칠게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수학에서 미분이란 어떤 함수의 순간 변화율인 미분계수를 구하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행위의 의미를 살필 때, 나는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 그 선택의 순수한 측면을 생각해 본다. 역사의 미분법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보면, 그 시대에 공산당원이라는 것은 가능한 선택의 하나였을 뿐 비윤리적이거나 반역사적이거나 반인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로당 조직책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시절의 이념적 선택을 지금의 눈으로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박정희의 결코 사면될 수 없는 죄과는 남로당 조직책이라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유린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 자신의 권력을 위협한다고 많은 민주 인사들을 고문하거나 살해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미분법에서 보았을 때에도, 비윤리적이거나 반역사적이거나 반인륜적인 것이다.
나아가 전체적 공과를 따질 때는 역사의 적분법을 쓰면 된다. 잘게 나눈 것을 다시 모으는 것이다. 그러면 미분법으로 보았을 때 여러 치명적 잘못을 한 박정희에게도 이 나라를 근대화한 커다란 공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게 된다.
홍범도 장군은 그의 순수한 동기로 보나 그가 이룬 결과로 보나, 잘못은 드물고 공적은 뚜렷한 인물이다.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어리석은 상징적 싸움은 이 정도에서 그치면 좋겠다. 답을 정해 놓고 부실한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이후에 역사적으로 단죄받을 일이다.
과거를 제대로 청산해야 역사가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미래가 중요하다며 과거를 덮을 수도 있다. 역시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억의 투쟁, 상징적 영토를 둘러싼 전쟁을 더 높은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역사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평원을 달리던 시대에, 한 인간이 선의를 다해 선택한 것을 두고 폄하하는 것은 옹졸하다.
역사와 정치를 평가하는 올바른 기준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자유·평등·연대·저항·평화·용서·다양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쪽의 공과를 모두 바라보고 중심을 잡는 중용의 길이다.
그런데 중용의 관점은 대중의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기에 역사와 정치는 양극단을 오가며 표류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보다 더 살 만한 나라가 되려면 의견이 중도로 수렴되는 정치와 의사소통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만들지 못해 큰 진통을 겪고 있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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