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칼럼] “세계 안보의 최대 위험은 미국?”
문정인 | 연세대 명예교수
“미국인들이 옳은 일을 한다는 건 항상 믿을 수 있지요, 시행착오가 있어서 문제지.”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자유진영에서 ‘자애로운 패권국’으로 자리 잡으며 동맹과 우방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숭앙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위상과 정책에 대한 비판이, 그것도 미국 내 주류 인사들의 자아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른바 ‘미국 무오류론’에 대한 거센 도전이다.
7월1일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미국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회장으로 20년간 재임하다 퇴임한 리처드 하스 인터뷰를 게재했다. 인상적인 대목은 “귀하의 밤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지금 세계 안보에 가장 심각한 위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다. “그건 우리.”(It’s us) 미국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것이다. 하스 회장은 미국 국내의 혼란이 러시아, 중국, 이란, 북한, 기후변화 등과 같은 외부 위협보다 더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미국 민주주의의 퇴행이 외교정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질타였다.
트럼프 진영의 2021년 대선 불복과 의회 난입, 민주·공화에서 양 극단세력의 발호와 이를 중재해주던 중도·온건파의 실종, 대승적 공동선과 국가 이익보다는 개인이나 정파의 이익에 치중하는 정치 토양 등 하스의 비관론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국내정치 구도가 미국 외교정책의 예측 가능성과 신뢰를 갉아먹고, 그럴수록 동맹과 우방은 미국을 믿고 따르기 어려워진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력의 상대적 쇠퇴를 겪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국제사회에서의 리더십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스 발언의 파장이 컸던 이유는 그와 외교협회가 차지하는 위상 때문이다. 1921년 설립된 100년 역사의 미국외교협회는 5000여명 회원을 가진 초당적 싱크탱크로 미국 사회 주류 엘리트의 시각을 대변해왔다. 특히 외교시사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를 통해 미국 외교정책의 큰 흐름을 주도해 오기도 했다. 하스는 그런 외교협회 회장으로 최장기 재임했고 지난 40년간 공화·민주당 정부를 오가며 외교분야 고위직을 역임했다. 평소 신중하고 균형 잡힌 발언으로 정평이 나 있는 하스의 발언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눈여겨볼 것은 2003년 하스에게 협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던 레슬리 겔브도 2009년 저서 ‘힘이 지배한다’(Power Rules)에서 비슷한 경고를 했다는 사실이다. 미 국무부 차관보, 뉴욕타임스 논설실장을 역임하고 10년 동안 외교협회장을 맡았던 겔브는 당시 갓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에게 헌정한 이 책에서 미국의 외교안보를 어렵게 하는 것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위협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스와 달리 겔브는 미국 민주주의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다. 폭력적인 트럼프 현상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미국 국내정치에 도사리고 있는 ‘세개의 악마’가 외교정책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고 통탄했다. 첫째는 가치와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해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이념적 경직성, 둘째는 정파적 이익 추구와 정치세력의 양극화 그리고 타협정치 부재로 나타나는 국내정치의 난맥상, 마지막으로는 자신감을 넘어 예외주의나 일방주의, 우월주의로 표출되는 미국적 오만(hubris)이 그것이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3년 이라크 침공 같은 미국 외교의 대표적이니 패착은 바로 이들 세개의 악마가 빚어낸 참극이라는 것이다.
궁금증은 이어진다. 처칠의 말대로 이는 단순히 미국의 시행착오였을 뿐인가, 그렇다면 왜 이후에도 미국은 유사한 정책 실패를 반복할까. 대단한 경륜과 배경을 가진 겔브와 하스의 충심 어린 경고와 충고는 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겔브는 대안으로 상식, 겸손, 신중성의 복원을, 하스는 깨어 있는 시민의 적극적 참여와 감시, 타협의 미덕과 공동선 추구 등을 말한다. 그러나 회의적이다. 시행착오의 반복을 피하려는 노력과 의지를 미국 정치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8월26일 밀워키에서 열렸던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 토론회의 내용을 보면 이는 극명해진다.
더 큰 염려는 그러한 미국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오늘 또는 내일의 미국은 우리의 운명을 전적으로 기대도 좋은 상대일까. 기소 이후에도 트럼프의 지지율이 여전히 바이든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지켜보며 드는 마지막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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