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불행을 가르쳐 드립니다!

한겨레 2023. 9. 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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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의 소소한 시선][무차별 범죄]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재영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나는 불행한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무차별 칼부림을 했던 33살 청년이 체포되면서 했다는 말이다. 이후 유사 범죄와 묻지마 살인 예고가 줄을 이었고 피의자 대부분이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잃을 것이/ 없다. 끝에 끝!”(츠베타예바, ‘끝의 시’)이라는 절망을 읽은 건 비단 나뿐일까? 이 새파란 청춘들을 증오와 분노로 끓게 했던 불행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선망했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끝’으로 내몰았던 건 누구 혹은 무엇이었을까?

눈을 뜨자마자 ‘카페인’(카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중독된 하루가 시작된다. 아, 더 강력한 유튜브도 있다. 손안에 펼쳐진 액정화면에서는 먹고 마시고, 입고 차고 들고 살고, 놀고 여행 다니는 ‘행복 배틀’ 경연장, 아니 ‘행복 포르노’ 전시장이 펼쳐진다. 그 행복의 근원은 돈이다. 볼수록 ‘비교 불행’, ‘상대적 박탈감’은 증폭되고, 관계와 소통과 공감의 척도란 좋아요, 구독, 팔로우, 조회수로 결정된다. 원색적인 감정 배설구가 된 댓글은 또 어떤가. 코로나 3년은 여기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개도 부럽지가 않어, 전혀”로 시작하는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를 자주 듣는다. 십만원 있는 자는 백만원 있는 자가 부러워 짜증 나겠지만, 백만원 있는 자는 천만원 있는 자가 부러워 짜증 나는 법이라고, 부러우니까 자랑하고 자랑하니까 부러워지는 거라고, 부러워하는 한 짜증 지옥을 벗어날 수 없으니 부러움을 모르는 자가 이기는 거라고, 그러니 얼마든 자랑하라고 자기는 전혀 괜찮다고, 와이어에 묶여 무중력 상태로 중얼거리는 그를 보면 금세 유쾌해진다. 장기하식 불행을 피하는 방법이랄까?

돈 모으는 데 전념하는 일, 처자식만 사랑하는 일, 부모 돌보지 않는 일, 맹자가 경계했던 삼불행이다. 이렇게 대놓고 가르치려 하다니! 젊어서 벼슬하는 일, 부모형제 힘으로 출세하는 일, 뛰어난 재능으로 문장을 떨치는 일, 이건 송나라 유학자 정이가 꼽았던 삼불행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음 직한, 타고난 금수저인 듯한 삼행복을 삼불행으로 퉁치다니!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부러우면 지는 거다, 너의 행복은 나의 불행의 심정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투기 아니 사기, 맘충 아니 학부모충, 아빠찬스 아니 엄마찬스, 입시전쟁 아니 무한경쟁, 노인빈곤 아니 고독사, 자살 아니 무차별 타살…. 매일 터지는 사회문제들이 이 삼불행을 겨냥하고 있지 않은가. 맹자나 정이는 인간 날것 그대로의 맹목적인 행복에의 욕망이 불행의 씨앗임을, 사회악의 뿌리임을 경고하고 싶었던 거다.

자살률 세계 1위, 인구절벽 세계 1위. 20대 우울·불안장애 환자 30여만명에 알코올, 마약, 흉기관련 사범 급증은 또 어떤가. ‘헬조선’을 외치는 엔(N)포세대,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니트(NEET)족과 특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프리터(Freeter)족이 태반인 엠제트(MZ)세대 얘기다. 이렇게 ‘끝’으로 내몰리는 피의자이자 피해자들이 청(소)년들이라면, 강력 대응이나 엄벌에 앞서 사회제도나 구조를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화무십일홍’(열흘 붉은 꽃은 없다)이랬거니, 이 말은 일년에 꽃을 준비하는 과정이 삼백쉰다섯 날이라는 거다. 행복을 꽃에 비유하자면, 꽃을 피우기 위한 허구한 날은 고통을 견뎌내거나 불행을 이겨내는 시간이다. 자연의 섭리 혹은 생명의 기본값이란 애초에 고통과 불행과 절망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기에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지 않던가. 하물며 그 꽃들은 또 얼마나 다른 만화(萬花)던가.

불행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가르치는 것, “저마다의 손금”처럼 저마다 다르면서 “은밀하게 말해야 하는 행복”(한정원, ‘시와 산책’)을 보여주는 것이 문학과 인문학의 몫이다. 반대 의미를 알고 있는 한 인간은 절망하지 않는다고 했거니, 인문 정신의 출발이자 도착점은 인간의 고통과 불행과 절망과 비극과 죽음을 가르치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잃어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그러기에 젊은 시인 박보영의 시를 나는 이렇게 패러디해 읽는다. “이상적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지쳐 있는 존재다”(‘적응을 이해하다’) ‘지쳐 있는’을 ‘불행해 보이는’으로 바꿔 읽는다. “악어가 진정 소망을 뜻할지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소망에게 잡아먹히거나 물어뜯길 거라고,”(‘소망’) ‘소망’ 대신 ‘행복’을 넣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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