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뜻 떠받든 ‘홍범도-러 연대’, 냉전 논리로 흠집내나

한겨레 2023. 9. 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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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년 10월~1943년 10월) 장군의 행적과 흉상 이전 문제가 큰 논란이 됐다.

때마침 올해 10월은 홍범도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땅 크즐오르다에서 서거한 지 80주기가 되는 달이다.

중앙아시아에 묻혀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지도 2년이 넘었다.

지난 8월29일과 31일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밖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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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윤 정부 ‘역사 쿠데타’][기고] 홍범도 독립운동 왜곡 논란
대한민국 원년(1919년) 12월 홍범도가 ‘노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 명의로 발표한 유고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공경한다는 것과 독립전쟁의 방침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최근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년 10월~1943년 10월) 장군의 행적과 흉상 이전 문제가 큰 논란이 됐다. 때마침 올해 10월은 홍범도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땅 크즐오르다에서 서거한 지 80주기가 되는 달이다. 중앙아시아에 묻혀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지도 2년이 넘었다. 따라서 그의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 그 정신과 가치,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 등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불멸의 자취를 반추하고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인 듯하다. 지난 8월29일과 31일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밖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과 이념을 무리하게 재단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국무총리는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도 바꿔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독립전쟁 영웅을 대하고 기려야 할까.

홍범도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인 189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의병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20여년 동안 줄기차게 일제와 싸웠던 대표적 무장투쟁가다. 그처럼 오랫동안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국내는 물론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 등지를 넘나들며 초지일관 항일투쟁을 벌인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물론 북한, 중국 옌볜(옛 북간도), 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의 한인들까지 모두 그를 추앙하고 있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주요 무대였던 북한 함경도 지방과 중국 옌볜,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그의 활동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가 민담과 민요,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해 전해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홍범도는 항상 부하와 주민, 독립군을 후원하는 민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부하와 동포들로부터 절대적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는 일화가 널리 전한다. 특히 1907년 말에서 이듬해 말까지 함경도 일대에서 주민들의 절대적 성원을 바탕으로 치열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여 수십 차례 전투를 치르며 일본 군경에 큰 타격을 주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1920년 전후 독립전쟁 때도 치고 빠지는 기습적인 유격전 방식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홍범도는 육사나 우리 군의 전범, 특히 게릴라전의 한 롤모델로서 상찬되고 깊이 연구 교육할 필요가 있는 영웅적 인물이다. 국방부 등 일각에서는 그가 소련공산당(1921년 6월 당시 러시아혁명 세력)과 협력하고, 그들 편에 섰다고 문제삼기도 한다. 특히 육사동창회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했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범도는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존중하고 임시정부의 방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1919년 12월 발표한 ‘유고문’을 ‘대한민국 원년 12월 노령(露領·러시아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大將) 홍범도(참모 박경철,이병채)’로 끝맺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서기 1919년이라 쓰지 않고, 임시정부 연호인 ‘대한민국 원년’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은커녕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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