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보수의 찬가 된 컨트리송 열풍, 바이든 앞 가로막나
테일러 스위프트 밀어낸 1·2·3위 모두 컨트리송
소외된 백인 보수층 열광…대선도 영향 미칠까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나는 하루종일 영혼을 팔며 일했어요.)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형편없는 급여를 받으며 초과 근무를 했지요.)
So I can sit out here and waste my life away. (여기 앉아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어요.)
Drag back home and drown my troubles away. (지친 몸을 질질 끌고 집에서 술로 잊어 보려고요.)
빨간 수염에 불그스레한 얼굴을 한 31세 청년. 17세 고교 중퇴 후 공장 근무 중 두개골 골절 사고를 당하면서 10년간 일용직을 전전한 흙수저. 청록색 반팔 티에 기타 하나 멘, 미국 중부 옥수수밭 어느 시골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백인 사내. 올리버 앤서니(Oliver Anthony)라는 이름의 무명 가수가 부른 ‘컨트리송’이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제목은 ‘리치 멘 노스 오브 리치먼드’(Rich Men North of Richmond·리치먼드 북쪽 부자들). 미국의 소외된 목소리를 담은 이 노래가 주류 음악판에서 갑자기 뜨자, 그 배경에 전 세계의 눈이 쏠리고 있다.
스위프트 밀어낸 ‘컨트리송 열풍’
2일(현지시간) 빌보드에 따르면 앤서니는 이날 기준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에서 1위에 올랐다. 2주 연속 1위다. 앤서니처럼 과거 어떤 차트 순위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무명 가수가 빌보드 핫100 1위로 데뷔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테일러노믹스’(Taylornomics) 신조어까지 만든 최고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크루엘 서머’(Cruel Summer)가 핫100 4위인 것을 보면 앤서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앤서니가 부르는 컨트리송은 말 그대로 시골 노래다. 허허벌판 텍사스 마을에서 카우보이모자를 쓴 아저씨가 흥얼거릴 것 같은, 딱 미국스러운 노래다. 굳이 한국식으로 보자면 트로트와 비슷하다.
그의 음악은 유튜브에서 처음 주목받았다. 지난달 초 직접 찍어 올린 영상이 이날 기준 5400만건을 돌파하면서 화제의 중심에 섰고, 빌보드까지 휩쓸었다. 아무리 일해도 비참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독백으로 시작해, 노동자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복지정책과 그 배후에 있는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가사가 미국인들의 공감을 산 것이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북쪽은 워싱턴DC를 뜻한다. ‘리치 멘’은 부유한 정치인들을 상징한다. 앤서니는 “그들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통제하고 싶어한다”고 노래한다. 국민의 삶은 안중에 없고 자신들의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는 정치인들을 꼬집은 것이다. ‘앤서니 신드롬’은 불과 한 달도 채 안 돼 벌어진 일이다.
특이한 것은 이 노래가 미국 중남부 백인 보수층이 즐기는 컨트리송이라는 점에서 ‘보수의 찬가’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폭스뉴스가 생중계한 지난 21일 공화당 첫 경선에서까지 앤서니의 영상이 나오면서 정치적인 논란은 극에 달했다. 공화당 내 유력 주자 중 한 명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는 경선 진행자가 미국이 왜 이렇게 이 노래에 열광하느냐고 묻자 “우리는 쇠락하고 있다”며 “바이드노믹스(Bidenomics·조 바이든 대통령의 경제정책)를 갈아엎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인들이 자꾸 예산을 늘리고 돈을 펑펑 쓰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앤서니는 공화당 경선 직후 소셜미디어 메시지를 통해 “내 노래를 정치 무기화하지 말라”고 언급했지만, 오히려 더 보수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어지는 기류다.
세계가 주목하는 ‘보수층의 찬가’
컨트리송의 급부상과 정치를 연결 짓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빌보드 핫100 2위는 루크 컴스가 흑인 여가수 트레이시 채프먼의 1988년 노래를 컨트리송으로 재해석한 ‘패스트 카’(Fast Car)다. 직업이 없는 남성과 편의점에서 일하는 여성이 언젠가는 빠른 차를 타고 힘든 처지를 벗어나겠다는 가사가 골자인 노래다. 컴스는 노래 맨 마지막에 “오늘 밤 떠나든지, 아니면 이대로 살다가 죽든지 결정해야 한다”고 불렀다. 흑인 여성의 하소연이 25년 후 백인 남성의 입에서 다시 나온 것은 현재 백인 노동자들의 처지가 1980년대 흑인 노동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쇠락한 러스트 벨트(Rust Belt·미국 중서부와 북동부 지역의 과거 제조업 공업지대)를 떠올릴 법하다.
핫100 3위는 모건 월런의 ‘라스트 나이트’(Last Night)가 차지했다. 이 노래 역시 백인 보수층이 적극 소비하면서 이미 14주 연속 1위를 달렸던 올해 최고 히트곡이다. 스위프트를 4위로 밀어낸 이들이 모두 백인 컨트리송 가수라는 점을 전 세계 문화계는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는 컨트리송 열풍이 내년 대선까지 영향을 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리턴 매치가 유력한 가운데 앤서니의 노래는 ‘미국 고립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당선된 것은 미국이 전 세계 각종 분쟁에 개입하며 나라 밖에서 돈을 쓰는 사이 정작 미국 시민들은 더 곤궁해졌다는 미국 내부의 불만과 무관하지 않다. 공화당 소속의 마조리 테일러 연방 하원의원(조지아주)은 “(앤서니의 노래는) 소외된 미국인들의 애국가”라고 칭할 정도다.
워싱턴포스트(WP)의 그레그 사전트 칼럼니스트는 “누구도 한 노래에 대해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분석하면 안 된다”면서도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 노래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블루칼라 우파 미국인들의 외침이라며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남 (jungkim@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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