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인의 예술가 그리고 사로잡힌 영혼.. “아주 찬란하지만 잔혹한 아름다움과 공명하는 법”
루이스 부르주아 등 “낯선데 매혹적인 삶과
작품들 한 자리에”.. 강렬한, 때로 부드러운
역설과 모순의 삶·예술.. “마음으로 접근”
“손에 꽃 한 송이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순간만큼은 그 꽃이 당신의 우주다” (조지아 오키프)
# 찬란한 붉은 빛이 시선을 붙잡는 조지아 오키프의 양귀비가 전면을 장식한 표지는 격정적으로 피다 스러지는 어느 예술가의 열정을 닮았습니다. 가족과 사랑, 우정, 커리어 등 온갖 눈 앞의 문제와 씨름하면서도 결국 자신만의 우주를 ‘작품’이란 답으로 풀어내 세상에 내놓은 여성 예술가들의 당당함부터 그들이 품었던 질투와 분노를 여과 없이 담아냈습니다. 저자 스스로 ‘미술애호가’로서, 그들의 삶과 작품에 자신을 반추하며 지낸 날들의 기록입니다. 시대에 얽매이거나 꺾이지 않고, 야망과 열정 속에서 메마른 아름다움과 나락을 응시하며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또 완성하기까지 전기이자, 시대상까지 꼼꼼하게 짚어냈습니다. 그림 혹은 작품마다 당시 현장과 시대를 산책하듯 거닐면서, 언뜻 긴장을 요구하는 묘사와 난해한 설명을 하면서도 중요한 개념이 자칫 말에 파묻히지 않아 또렷이 더 잘 드러나게 긴장을 잃지 않습니다. 글이 그림을 더 ‘보이게’ 만드는 미덕입니다.
제주 갤러리 ‘공간 누보’를 운영하는 송정희 대표가 발표한 책 ‘매혹하는 미술관’(아트북스)입니다. 조지아 오키프, 마리 로랑생, 천경자, 수잔 발라동, 키키 드 몽파르나스, 카미유 클로델, 판위량, 마리기유민 브누아, 프리다 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 책에서 다루는 미술가 12명은 가족과 얽힌 폭력과 트라우마, 강렬한 사랑이 불러온 깊은 상처, 비극적인 사고, 사회적 장벽 등을 마주한 인물들입니다.
모두 4장으로 구성된 책은 먼저 ‘아름다움, 그 너머’에서 화려한 그림 뒤에 숨은 작가들의 아픔과 고독을 풀어냅니다. 대담하게 확대한 꽃 그림으로 데뷔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후기 뉴멕시코 사막에서 구도자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외롭고 힘들었던 삶과 대조되는 색색의 물감과 광기로 형형한 눈빛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을 그린 천경자, 여인들이 서로 친밀하게 쓰다듬거나 이야기하는 파스텔톤의 고유한 화풍을 고집해 ‘잊히지 않은 여인’으로 남은 마리 로랑생의 삶과 예술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뮤즈에서 예술가로’에선 남성 예술가들의 모델 혹은 조수에서 예술가가 된 뚝심 있고 용감한 여성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르누아르의 아름다운 소녀로 그림 속에 살기보다 화가로 살기를 선택하며 프랑스국립예술협회 최초 여성 회원이자 살롱전 참가자로 이름을 남긴 수잔 발라동, 만 레이의 모델로 유명했고, 헤밍웨이가 서문을 바친 회고록의 저자이자 첫 전시회에서 모든 작품을 판매한 재능있는 예술가 키키 드 몽파르나스, 로댕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작품에서만큼은 그의 그늘을 벗어나 당당하게 실력을 인정받으려 한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의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어 ‘몸을 통해, 몸을 위해’는 자유와 억압, 자기와 타자, 사적이면서 공적인 공간이 교차하는 ‘몸’에 대한 사유를 작품으로 풀어낸 미술가를 소개합니다. 중국 초기 현대화 운동에서 여성 미술가로는 드물게 미술대학 교수까지 지낸 판위량은 어릴 적 몸종으로 팔려가 창기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 여성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을 전복하는 누드화를 그렸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민족적 전통과 서구미술의 전통, 장애를 가진 몸과 넘치는 에너지, 혁명가의 심장과 예술가의 자아 사이에 복잡하게 요동치는 내면을 신화와 환상과 실제가 뒤엉킨 그림으로 표현했고 신고전주의 화가 마리기유민 브누아는 오늘날까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마들렌의 초상’을 남겨 몸을 둘러싼 시대적 맥락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복과 치유의 약속’에선 고통으로 출발해 회복과 치유를 종착지로 삼는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를 초대합니다. 대담하게 퍼포먼스에 뛰어들어 관람객에게 형언할 수 없는 경험과 에너지를 전하는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연대와 저항의 메시지를 담아 판화를 제작한 케테 콜비츠, 개인의 고통을 반영한 난해하고 다면적인 작품으로 재생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세계를 짚고 이들의 파격적인 작업이 단지 고통의 전시 혹은 고발을 위한 것이 아닌 화해와 이해를 위한 예술적 실천의 연장선임을 전합니다.
“이 땅에 꽃이 피고, 내 마음속에 환상이 사는 이상, 나는 어떤 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살고 싶어질 것이다.”(천경자)
저자는 열두 명의 작가들, 저마다 고된 삶과 화려한 작품 사이 괴리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 위안 받았음을 부러 고백합니다. 스스로 예술에 빠지고 미술을 업으로 삼게 된 것 역시 미술이 이처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모두 포용하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그래서 머리와 이성보다, 마음으로 다가서는 ‘매혹’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한다 손꼽는 그림보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마음을 파고 들어오는 그림이 더 오래 남듯이, 잔상을 따라 예술가의 삶에 다가가면 결국 그 세계에 ‘매혹’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 과정을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조선의 문장가 유한준의 말로 대신합니다.
책에선 조지아 오키프의 ‘검은 붓꽃 II’를 비롯한 회화들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사진들, 천경자의 ‘생태’와 ‘황금의 비’ 등 12인의 작품 80여 점을 원색 도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연세대학교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서던일리노이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어교육학 공부 이후 고려대학교 국제어학원과 제주대학교 등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2009년부터 10년 동안 제주도에서 영자 신문 ‘제주위클리’ 발행인으로 일했고 현재 (사)제주국제화센터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제주 출신 화가 변시지 그림에 반해 작품집을 발간했고, 전시를 기획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전시와 미술 강의를 꾸준히 기획·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제주돌문화공원과 공동 주관한 기획전 ‘백남준과 제주, 굿판에서 만나다’(2023)를 총괄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Copyright © JI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