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비정규직 27% "주68시간 이상 근무" 68% "연차없어"

김예리 기자 2023. 9. 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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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크레딧 출범, 설문조사 발표 "당사자들이 얼굴 돼 싸우겠다"
구조조정도 비정규직부터 예고 "방송사가 구축한 직종 고용형태 벽 넘어야"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방송사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비정규직이 모인 당사자 중심의 노동인권단체 '엔딩크레딧'이 1일 출범했다. 엔딩크레딧은 방송작가와 독립PD, 출판 편집자, 아나운서를 비롯한 방송 스태프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출범식에 참가한 가운데 방송비정규직 대다수가 '방송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직접고용 의무를 진다'고 답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은 1일 저녁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출범식을 열었다. 엔딩크레딧은 영화가 끝난 뒤 스크린에 나열되는 영화를 제작한 사람들의 명단을 말한다. 방송사와 제작사가 그 존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방송 노동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였다는 뜻이다. 고 이재학 CJB청주방송 PD의 동생 이대로 씨가 대표를, 진재연 직장갑질119 활동가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대로 대표는 여는 발언에서 엔딩크레딧을 출범한 취지를 설명했다. “방송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기 계신 당사자들이다. 한 분 한 분을 상대하기 위해 방송사들은 사활을 걸고 모든 것을 투입한다. 한두 명, 다섯 여섯 명 모이면 충분히 판을 바꿀 수 있다.”

▲엔딩크레딧 대표를 맡은 이재학 CJB청주방송 PD의 동생 이대로 씨. 사진=김예리 기자

이대로 엔딩크레딧 대표 “목소리 모이도록 얼굴 되겠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방송 현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기 어려운 조건이 있다. 이대로 대표는 이것이 당사자 중심 단체를 꾸린 이유라고 했다. “방송제작 현장엔 직종이 워낙 다양하다. 일도 다르고 근무시간이 같은 구조도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목소리를 하나로 만들어내느냐가 저희가 도울 부분이다.”

그는 이어 “(목표는) 방송 노동자들이 자신 있게 얼굴을 내놓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방송사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능한 자들이니 저희가 당사자 분들의 얼굴이 되고, 저희의 얼굴을 충분히 팔겠다”고 말했다.

실태조사 결과 85% “방송사에 직고용 의무”

엔딩크레딧은 이 자리에서 지난달 10일부터 23일까지 전국 방송 비정규 노동자 456명을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절대 다수가 방송사들이 비정규직(프리랜서 포함) 노동자를 직접고용할 의무가 있다고 답했으며 전체 응답자의 과반은 근로자 지위를 얻기 위한 법적 다툼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도 했다.

조사에 응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52.2%는 '방송사가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직접고용할 의무가 있느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고 답했고 32.9%는 '그런 편'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거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은 각각 13.5%와 1.5%에 그쳤다.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정규직 전환 소송) 의사가 있다고 밝힌 노동자는 58.4%였다. 이들은 정규직 전환 소송에 나설 의사에 대해 '매우 있다(29.2%)' '있는 편(29.2%)'라고 답했다.

방송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별도 10문10답을 통해 방송일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과 가장 힘든 상황을 서술한 답변. 사진=엔딩크레딧의 방송비정규직 실태조사 결과 발표자료 갈무리▲방송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방송일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과 가장 힘든 상황을 서술한 주관식 답변. 사진=엔딩크레딧의 방송비정규직 설문조사 결과 발표자료 갈무리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방송사가 고용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 받은 사건을 인지하고 있느냐는 질문엔 36.1%가 알고 있다고 답했다. 당사자 중심 노동인권단체인 엔딩크레딧이 출범하면 가입하겠다고 밝힌 비율은 40%(90명)에 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은 열악했다. 주 평균 68시간 이상 일한다고 답한 비율이 27.4%로 3명의 1명 꼴이었다. 52~68시간이라고 답한 경우도 27.1%였다. 10명 중 4명은 최근 1년 새 임금체불을 겪었다고 답했다. 한편 연차휴가가 없다는 답은 68.6%나 됐다. 하은성 샛별노무사사무소 노무사는 “(주관식 답변에) '5년 뒤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깨어있는 시간엔 일한다, 체력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답변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통계로도 나타난 것”이라며 “방송 스케쥴에 얽매여 움직이니 회사에 종속되면서도 불규칙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방송 '프리랜서'들이 폭행이나 폭언을 경험한 경우는 33.3%에 달해 직장인 평균의 2배(17.2%, 직장갑질119 분기별 조사)였다. 부당 지시를 겪었다는 답변도 43.3%로 직장인 평균치(16.1%)의 2.7배, '모욕과 명예훼손'도 54.9%에 달했다. 하 노무사는 “계약 형식의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방송사 관행이 여전히 만연하고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광주MBC 위장 도급·프리랜서 문제제기
방송작가들 차별없는노동조합 출범 등 당사자 모여

회사를 상대로 직접고용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싸움을 시작한 방송노동자들도 참석해 현장 상황을 전했다. 광주MBC에서 10~18년 동안 간접고용으로 일하다 소송을 시작한 노동자 8명이 여기에 속한다. 소송 당사자 A씨는 노동자들이 회사에 위장도급 문제 해결과 직접고용을 회사에 요구해온 지 수년 만에 소송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10년 전부터 노동조합을 찾아가서 (정규직 전환을) 얘기해왔다. 회사도 긍정적으로 얘기했었다. 작년까지도 직접고용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노조위원장 임기는 2년, 사장 임기는 3년이다보니 사람이 바뀌면 논의가 처음으로 돌아갔다. 회사는 저희의 '소송하겠다'는 말을 낮게 봤는지 모르겠는데, 실제 소송을 하자 회사가 뒤집어졌다. 그러나 무늬만 프리랜서 아나운서 건도 진행 중인데, 회사가 몇 차례씩 (노동청 진정 등 사건에서) 졌는데도 끝까지 하겠다는 태세다. 회사는 그런 돈이 참 아깝지 않나 보다.”

MBC에서 '무늬만 프리랜서'로 10년가량 일하다 부당해고 당한 뒤 법원 승소 끝에 복직해 'MBC차별없는노동조합'을 꾸린 방송작가 B씨도 참석했다. B씨는 “승소한 최초의 작가들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MBC에 들어갔음에도 엔딩크레딧엔 여전히 저희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프리랜서' 땐 휴가가 전혀 없어서 명절이고 뭐고 주6일 새벽 3시 출근했다. 그런데 복직해서 보건휴가를 쓰겠다고 하니, 보도국 기자들, 누구보다 더 비정규직 인권을 얘기하는 분들이 처음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너희는 왜 유난스럽게 들어오자마자'. (…) 그래도 그거 하나는 한 명이 (휴가를) 쓰면 다른 작가가 일하는 시스템으로 따냈다.”

B씨는 “노동자성 인정 받아 회사가 무기계약직 전환시킨 6명이 노조를 만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금 관심을 보이더라”며 “달팽이 속도지만 방송 일이 너무 하고 싶은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차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1일 지상파 방송사 협회인 한국방송협회가 주최한 '방송의날' 행사장에서 방송비정규직 노동자와 활동가, 고 이재학 CJB청주방송 PD의 동생 이대로씨 등 9명이 기자회견을 엔딩크레딧 출범을 알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방송사가 구축한 직종과 고용형태의 벽 넘어야”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활동 목표를 밝혔다. 먼저 현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법률 대응을 넘어 폭넓은 문제 제기를 시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국에 흩어진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결고리를 구축하고, 주류 언론이 외면해온 사안이 보도되도록 존재를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각 직종 간 벽을 넘어선 연대를 모색한다고도 밝혔다.

엔딩크레딧은 “수십 년간 사용자가 견고하게 구축한 비정규직 백화점에서 노동은 분절되고 고용형태에 따라 노동조건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며 “사용자 방송국은 긴 세월 비정규직을 착취해 막대한 이윤을 축적했지만 이제 시장 위기를 언급하며 '비정규직부터 구조조정'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비단 비정규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직종 대 직종간 경계를 넘어선 연대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비례)과 류호정 정의당 의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김선혁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장, 홍태화 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을 비롯해 노동·시민사회·법률단체들이 이날 출범식에 축사를 했다.

진보당은 신하섭 부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엔딩 크레딧의 출범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억압과 차별에 맞서 방송 제작 현장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며 “방송계의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는데 진보당도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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