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천국, 기업 지옥…무너진 '진보 도시'

이덕주 기자(mrdjlee@mk.co.kr) 2023. 9. 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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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텐트촌으로 전락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심가 전경. 블룸버그

세계적인 테크 기업들의 연례 행사가 열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모스콘센터. 수억 원대 연봉을 받는 개발자와 임원이 몰려드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불과 두 블록만 걸어가면 노숙자(홈리스)들이 골목 한 블록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여기서 10분만 걸어가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끔찍한 '지옥도'를 보여주는 장소인 텐더로인(Tenderloin)이 있다. 노숙자들이 대낮 길거리에서 마약을 주사할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마약 거래도 한다. 서울에 비유하자면 광화문 옆 청계천을 노숙자가 가득 채우고, 이곳에서 마약도 거래되는 격이다. 지난해 말 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시내 노숙자 수는 7700명에 달한다. 샌프란시스코가 인구 80만명의 작은 도시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노숙자와 마약이 샌프란시스코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 관광객들이 도시를 멀리하고, 상업시설들은 문을 닫고 있다. CNN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시 중심가에 있던 매장 40곳이 문을 닫았다. 미국 유명 백화점인 노드스트롬은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 노드스트롬 유니언스퀘어점을 35년 만에 폐점했다. 노드스트롬은 지난달 27일 마지막 영업을 했고, 백화점 건물을 운영해온 웨스트필드 역시 운영권을 포기했다. CNN 등에 따르면 노드스트롬 백화점 매출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4억5500만달러(약 6033억원)에서 2022년 2억9800만달러(약 3944억원)로 감소했고, 매장을 찾는 유동인구도 2019년 970만명에서 2022년 560만명으로 반 토막 났다.

코로나19가 끝나면서 미국 전역에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지만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2019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경제의 주축인 테크 기업들도 도시를 떠나고 있다. 지난달 모스콘센터에서 '구글 클라우드 넥스트 2023' 콘퍼런스를 열었던 구글은 내년엔 라스베이거스에서 행사를 열겠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한 찰스슈와브는 2021년 본사를 텍사스로 옮겼고, 남아 있는 직원 수도 크게 줄였다. 올해 1분기 샌프란시스코의 사무실 공실률은 24.8%다. 팬데믹 이전보다 5배 이상 높은 수치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한국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A씨는 "샌프란시스코의 문제는 시내 중심지를 노숙자들이 점령했다는 것"이라며 "우리 직원들도 노숙자 공격을 비롯해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시 정부는 노숙자들을 거리에서 쫓아낼 수 없다. 노숙자를 강제로 쫓아내려던 시도를 미국 연방 법원이 지난해 12월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노숙자에게 충분한 숙소를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쫓아내는 것은 인권을 침해한다는 '노숙자 연합' 단체의 헌법소원에 대해 손을 들어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지역이고 '민주당'의 텃밭이다. 하지만 도시 치안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경제가 영향을 받으면서 시민들은 급진적인 진보 정치인과 그들의 정책에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시아계와 테크 업계 종사자들 주도로 시민단체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정치운동을 하고 있다.

'반진보' 운동단체 중 하나인 그로SF의 스티븐 부스 공동창업자는 "그동안 좋게만 보였던 정책들이 사실은 나쁜 결정이었고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들어냈다"면서 "이제는 유능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또 다른 문제는 상점에서 도난이 만연하다는 점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타깃이나 CVS 같은 대형 상점에는 자물쇠로 상품 진열장을 잠가놓은 곳이 대부분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좀도둑이 물건을 그냥 들고 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SF에 따르면 2014년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도입한 '발의안47'이 원인이다. 이 발의안은 950달러 미만의 절도죄에 대해선 중범죄로 기소하지 않는 조항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찰들이 물건을 훔쳐가는 범인을 발견해도 950달러 미만의 벌금 딱지를 부과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결과를 만들었다.

발의안47은 마약 문제도 키웠다. 이 발의안은 마약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받는 것을 비범죄화했다.

개발과 성장을 가로막고 평등만을 추구하는 정책도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샌프란시스코 주택 공급을 막는 정책이다. 샌프란시스코는 다이앤 파인스타인 현 캘리포니아주 상원 의원이 시장으로 지내던 1980년대에 3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난개발을 막고 도시 미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후 샌프란시스코는 주택 공급 부족으로 높은 임대료가 지속되고 있다. 노숙자가 많은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지적이다.

[실리콘밸리 이덕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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