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벨라루스, 넌 누구냐

이향휘 기자(scent200@mk.co.kr) 2023. 9. 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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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형제 나라였던
우크라·발트3국과 다른 길
30년간 루카셴코 독재
자유에는 대가와 용기 따라

"그들은 누구인가. 러시아인, 아니면 소련인? 아니, 그들은 소련인임과 동시에 러시아인이었고, 벨라루스인이었고, 우크라이나인이었고, 타지키스탄인이었다."

2015년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속 문장이다. 벨라루스 출신의 작가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소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 전쟁에 참여한 당시 소비에트 여성들의 혼재된 정체성을 이렇게 되물었다. 그 역시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에서 활동하고 있고, 아버지는 벨라루스인,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같은 몸에서 난 형제들도 제각각의 길을 걷지만, 한때 형제 나라였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전장을 내어주고 있는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에 사실상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발트3국도 일찌감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며 친서방 노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오직 벨라루스만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있다. 최근 석연찮게 비행기 추락사로 목숨을 잃은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반란 후 망명지로 택한 곳이 벨라루스고, 바그너 그룹 4000명은 여전히 벨라루스에 머무르고 있다. 벨라루스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가 긴장하는 이유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세 나라는 언어와 종교,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세 민족 모두 슬라브계로 언어가 매우 유사하고 기독교 그리스정교의 전통을 계승했다. 1991년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나란히 독립했다. 비슷한 시기에 발트3국의 독립도 이뤄졌다.

하지만 독립 이후 노선에선 적잖은 차이가 발생했다.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3국은 소련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민족주의자들을 주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길로 나아갔다. 독립하자마자 탈러시아 노선과 함께 곧바로 친서방 질서에 편입했다. 우크라이나의 민주화 길은 이보다 더뎠고 복잡했다. 2004년이 돼서야 친러시아 정권의 붕괴를 이끈 '오렌지 혁명'이, 그리고 또다시 10년 뒤엔 유로마이단 운동이 일어났다. 두 차례의 민주혁명을 치르며 자유를 획득해 나갔다. 반면 벨라루스에선 구소련 붕괴 당시에도 독립을 관망하며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더니 지금까지 그 '흔한' 색깔혁명의 기운은 일지 않았다. 6선에 성공하며 30년 가까이 철권 통치를 휘두르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1인 독재 체제에 갇혀 있을 뿐이다.

어째서 벨라루스만이 인근 국가와 다른 길을 걷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워낙 높아서다. 사실상 같은 경제권이다. 특히 천연가스와 석유를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는 수년 동안 벨라루스에 낮은 가격으로 에너지 자원을 공급하며 벨라루스를 길들여왔다. 수출 역시 러시아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다 보니 러시아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경제가 바로 몰락하는 구조다. 실제 구소련 독립 직후 혹독한 경제난이 찾아왔다. 상점은 텅텅 비고 식료품은 배급제로 받았다. 빈곤과 무법 상태가 계속되자 구소련 시대가 나았다는 자조가 터져 나왔다. 이 같은 여론을 등에 업고 1994년 정권을 차지한 사람이 소련군 국경수비대 장교 출신 루카셴코다.

루카셴코는 지난 30년간 다변화를 추구하기보다 러시아의 경제·정치적 지원이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체제를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소비에트 벨라루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 결과 벨라루스인들은 구소련 제도와 문화의 잔재에 저항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벨라루스는 흔히 '백러시아'라 불린다. 흰옷을 즐겨 입는 '백의민족'이라는 점이 우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자신만의 국가 정체성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키우지 못했기에 오늘날 '유럽 최후의 독재자'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 자유에는 대가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이향휘 글로벌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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