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감 휩싸인 고려인 마을 ‘홍범도 공원’…광주 월곡동 가보니
3일 오전 광주 광산구 월곡동 ‘홍범도 공원’(다모아어린이공원)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앞에 70대 고려인 노인이 하얀 국화꽃 한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노인은 말없이 흉상 앞에 꽃을 내려 놓은 뒤 지팡이를 짚으며 자리를 떠났다.
기자가 “꽃다발의 두고 간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국화꽃 옆에는 누군가 먼저 두고간 꽃바구니도 놓여 있었다.
1.4m 높이의 흉상은 장군이 묻혔던 카자흐스탄 홍범도 공원의 흉상을 본 떠 만들었다. 지난해 8월15일 광산구와 월곡동에 사는 고려인 주민들은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봉환된 1주년을 기념해 흉상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강제이주됐던 고려인들에게는 자부심과 정체성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애초 어린이공원이었던 이곳은 흉상 건립 이후 ‘홍범도 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월곡동은 중앙아시아에서 흩어져 살다 고국으로 이주해 온 고려인 동포 7000여명이 모여 사는 전국 최대 규모의 ‘고려인 마을’이다. 국내에서 고려인들의 공동체 문화가 형성된 곳은 광주가 유일하다.
홍범도 공원 역시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상징 공간이 됐다. 지난달 15일 제78주년 광복절에도 이 공원에서는 고려인 마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주최한 ‘광복절 행사’가 열렸다. 행사 주제는 장군이 이끌었던 ‘봉오동 전투’였다.
500여명 고려인 마을 주민들과 학생·시민·자원봉사자 등은 이날 태극 문양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푸른색 비옷을 입고 태극기가 그려진 우산과 물총을 들었다. 1920년 홍범도 장군이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던 봉오동 전투를 ‘물총 놀이’ 형식으로 재현하고 기억한 것이다.
하지만 3일 찾아간 홍범도 공원 주변은 떠들썩했던 광복절 행사 때와 달리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육군사관학교가 장군의 흉상을 육사 밖으로 옮기기로 하고 ‘공산주의자’라고 몰아세우며 이념 논쟁에 빠뜨리는 상황에 대해 고려인들은 깊은 우려를 나타내면서도 말을 아꼈다.
공원 인근을 지나던 고려인들은 홍범도 장군과 관련한 질문에 “잘 모르겠다” “대답할 수 없다” 등 불편해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려한 40대 한 고려인은 “홍범도 장군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결국 고려인동포 모두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며 “우리는 한국에서도 또 버려지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이같은 배경에는 이들이 국내에 체류하거나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조야 고려인 마을 대표는 “한국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고려인 입장에서는 홍범도 장군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밝히기 쉽지 않다”면서 “찍히면 언제든 한국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마을에 있다”고 전했다.
김병학 월곡고려인문화관장은 “고려인들이 요즘처럼 불안해하는 것은 처음 본다”면서 “구 소련에서 소수민족으로 숨죽여 살았던 고려인 동포들을 또다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하는 게 맞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귀한 기자 g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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