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고진 제거에 러시아 총참모부 직속 비밀공작부대 동원됐을 것”
러시아군 정보총국에서 요인 암살 수행해온 ‘GRU 29155부대’ 거론돼
(시사저널=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공동 창업자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8월29일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묘지에 묻혔다. 프리고진은 8월23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바그너그룹 전용 제트기에 탑승했다가 비행기가 중간 지점인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숨졌다.
유로뉴스는 장례식에 50명 이하의 소수만 참석했다고 보도했으며, 독일 국제방송인 '도이치벨레(DW)'는 장례식이 군인장이 아닌 개인장으로 치러졌다고 전했다. 보도 영상에 따르면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공동묘지 주변은 보안요원들이 둘러쌌으며, 일부는 경비견을 데리고 주변을 순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의 죽음이 확인된 후 유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면서 "그를 1990년대 초반부터 알고 지냈으며, 재능 있고 유능한 사업가였다"며 "힘든 운명을 타고난 사람으로 인생에서 심각한 실수도 저질렀다"고 가시 돋친 평가를 했다.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프리고진은 러시아의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과의 불화 끝에 6월23~24일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바그너그룹 용병들을 빼내 모스크바로 위협적인 진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푸틴과 절친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철군하고, 벨라루스로 떠나는 대신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처벌을 면제받았다. 푸틴은 당시 무장반란 주모자 프리고진과 타협하면서 위신에 흠집이 났다. 이 때문에 이른 시일 안에 보복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는데, 결국 프리고진은 반란 2개월 만에 의문의 비행기 추락으로 숨졌다.
영국 대중지 '데일리메일'은 러시아 텔레그램 채널을 인용해 기체 잔해에서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일부가 없는 남자와 문신을 새긴 사람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데일리메일은 바그너그룹 관계자가 전자를 과거 감옥에서 왼손 손가락 일부를 잃은 프리고진, 후자를 프리고진의 오른팔인 드미트리 우트킨의 시신으로 인지했다고 전했다. 러시아 당국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수습한 시신의 신원을 최종 확인했다고 밝혔다. 푸틴에게 '반역자'로 불렸던 프리고진의 잔혹한 최후다. 이번 비행기 추락이 누구나 예상하는 대로 푸틴의 보복이라면, 그 공작을 누가,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관심이 쏠린다. 러시아 비밀·비합법 정보·공작 조직의 활동상 등을 바탕으로 프리고진 사망 사건을 재구성해 본다.
비행기 추락 원인, '의도적 폭발'로 결론 내려
프리고진이 탑승했던 바그너그룹 전용기의 추락 원인은 당일 촬영된 일부 동영상과 서방 정보기관이 언론에 흘린 정보를 바탕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개된 동영상과 사진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프리고진의 전용기로 보이는 소형 항공기가 거의 수직으로 고꾸라지는 듯 지상으로 추락하는 동영상이다. 또 하나는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주변에서 추락해 불길에 휩싸인 동영상이다. 마지막은 인근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추락 항공기의 잔해 영상과 사진이다. 여기에는 서방이 공개한 인공위성 사진도 포함된다. 서방 정보기관 등은 사고기가 추락하기 30여 초 전에 여러 차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다 갑자기 고속 추락한 비행 데이터를 공개했다. 뉴욕타임스(NYT)는 8월25일 추락 영상과 수차례에 걸친 급작스러운 고도 변화, 잔해 등을 감안할 때 프리고진이 탑승했던 비행기가 추락 몇 분 전에 몇 차례 이상 현상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비행기가 폭발이나 연료 이상 등으로 갑자기 조종 불능 상태에 빠진 것으로 봤다.
AP통신과 블룸버그통신은 같은 날, 미국 정보 당국자들은 기내에 설치된 폭탄이 터지면서 비행기가 추락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번 추락이 푸틴 대통령이 승인한 암살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정보 당국도 누군가 비행기를 고의로 추락시킨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AP통신은 미국과 서방 당국자를 인용해 정보 당국의 사전 평가에서 비행기 추락 원인을 '의도적 폭발'로 결론 내렸다고 보도했다. 당국자들은 특히 이번 사건이 비판 세력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시도해온 '푸틴 대통령의 오랜 노력'과 일치하는 걸로 평가했다고 AP는 전했다.
독이 든 홍차·신경가스 등으로 정적들 살해
'푸틴의 오랜 노력' 사례는 이미 숱하게 많다. 대표적인 것이 2020년 8월 야권 정치인인 알렉세이 나발니 사건이다. 푸틴의 정적 나발니는 러시아 비밀공직기관이 애용하는 독물인 노비촉 중독으로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다가 독일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으로 후송돼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2015년 2월에는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야권 정치인인 보리스 넴초프 전 제1부총리가 모스크바 크렘린궁 인근의 다리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당시 공개된 CCTV에는 가로등이 훤하게 켜진 다리를 혼자 건너던 넴초프 옆에 청소차가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는 모습이 찍혔다. 차에 가려 잠시 보이지 않던 넴초프는 그 직후 총에 맞고 바닥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2013년 3월에는 푸틴을 공개 비판했다가 영국 런던으로 망명해 빈털터리가 된 러시아 올리가르히(과두재벌)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해 9월에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던 라빌 마가노프 루크오일 회장이 입원 중이던 모스크바 병원의 창문으로 추락해 숨졌다. 루크오일은 러시아의 최대 민영 석유업체다. 러시아에서 푸틴을 비난했다가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후 영국 대외정보기관인 MI6에 러시아 조직범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자문에 응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전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호텔에서 독이 든 홍차를 마신 후 숨졌다.
정보 전문가들은 이번 프리고진 죽음에 러시아군 총참모부 직속 정보총국(GRU)에서 비밀공작을 수행해온 'GRU 29155부대'가 동원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이 부대는 NYT가 2019년과 2020년 보도하면서 비로소 외부에 알려졌다.
2008년부터 요인 암살에 동원된 이 부대의 대표적인 표적이 전직 러시아군 정찰총국 대령이면서 영국 정보기관인 MI6의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던 스크리팔이다. 스크리팔은 2004년 체포돼 비밀재판에서 13년형을 받았지만 2010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의 사면을 거쳐 2013년 스파이 교환으로 영국에 넘겨졌다. 하지만 러시아는 2018년 영국 솔즈베리에서 딸 율리아와 함께 숨어 살던 스크리팔을 기어이 찾아내 신경가스로 살해를 시도했다. 암살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푸틴 시대 러시아의 암살 공작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네덜란드의 탐사보도 매체인 벨링캣과 프랑스의 르몽드, 영국의 더 타임스, 독일의 국제방송 도이치벨레(DW) 등에 따르면 'GRU 29155부대' 소속 공작원들은 2014~18년 샤모니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알프스 지역 리조트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졌다. 이곳에 휴가 오는 스크리팔을 기다리며 암살공작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다. 배신자와 정적에 대한 러시아식 보복이 얼마나 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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