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前 '수출 효자' 합판산업…저급한 외국산이 벼랑으로 몰아

김성진 기자 2023. 9. 3.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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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정부가 정한 수출특화산업...1968년 총수출 10% 이상 차지
건설현장 필수 자재인데 수입산에 안방 내줘..."값싼 저급 합판 판친다"
7년새 업체 5곳→2곳, 넉달 전 선앤엘 사업 중단...남은 곳도 "의지로 한다"
"외국산 의존 위험...'요소수' 사태 벌어질수도"

수출이 경제 발전을 이끌던 1960년대 총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하던 '효자' 합판 산업이 이제 고사할 위기에 처했다. 값싼 저급 외국산 합판에 국내 시장을 뺏기고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업체 한곳이 사업을 추가로 접었고 남은 두곳도 위태로운데, 건설현장 필수 자재인 합판을 수입에 의존할수록 2년 전 겪은 '요소수 대란'을 겪을 위험도 커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합판업계에 따르면 선앤엘은 지난 4월30일 합판 생산을 완전히 중단했다. 1967년 처음 생산했고, 1969년 수출까지 하며 60년 가까이 해온 사업을 접은 것이다. 선앤엘은 2021년 합판으로 매출 576억원을 거뒀었다. 총매출 4563억원의 약 12.4% 수준이었는데 선앤엘은 사업 자체가 "적자였다"고 했다. 지난 3월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리고 "저가 수입 합판의 공세와 시장 점유율 하락, 원가 경쟁력 하락으로 더 이상 합판 생산의 적자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제 국내 합판 제조업체는 부산의 성창업과 인천의 이건산업 두곳이 남았다. 업계 관계자는 두곳도 "이익이 난다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라며 "합판이 모태가 되는 사업이다 보니 놓치 않겠다는 의지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합판은 얇게 자른 나무 판, 업계 용어로 베니어를 여러겹 겹친 자재를 말한다. 가구, 인테리어 자재로도 쓰이지만 60%가량이 공사장 '콘크리트 거푸집'으로 쓰인다. 본격적으로 건물을 올리기 전 제일 밑바닥을 만들 때 콘크리트가 설계대로 굳을 수 있게 모양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거푸집 없이는 웬만한 공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1950년대 한국전쟁 피해 복구 사업이 시작되고 수요가 크게 늘었다.

국내 업체들은 1940년대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성창산업이 1948년 생산을 시작하고 이후 이건산업 등이 합세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국내에서 해외로 가장 많이 수출하던 게 합판이었다. 1968년 수출액이 6800만 달러를 넘어 한국 총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했고 1976년에는 수출액 3억5900만 달러를 기록했다.

1965년 성창기업주식회사 수출용 베니어합판./사진=국가기록원 홈페이지.

한창 승승장구하던 합판업계는 외국산이 국내 시장에 유입되며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한국합판보드협회에 따르면 국내에서 합판은 한해 평균 2000㎥(입방)씩 소비되는데 국내산 점유율은 2013년 23.6%에서 지난해 12.9%으로 줄었다. 선앤엘이 사업을 접었으니 올해 점유율은 10%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수입국 중에는 동남아 국가가 많다. 지난해 기준 수입국 50.3%는 베트남이다. 이어 인도네시아(31.6%), 중국(9.0%), 말레이시아(4.3%) 순이다. 대체로 가격이 국산보다 싸다. 규격이 같은 제품이 국산은 한장당 1만5500원이면 베트남산은 1만2500원이다.

동남아 경쟁사들은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다. 특히 베트남은 속성수라 부를 정도로 빨리 자라는 고무 나무가 풍성하다. 일부 동남아 지역은 불법 벌목이 성행해 원가를 아끼고 합판을 자체 생산한다고도 전해졌다. 한국은 베트남 활엽수, 뉴질랜드 침엽수 뉴송을 비싼 값에 물류비까지 치르며 들여온다.

인건비 부담도 크다. 합판 산업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베니어를 지그재그로 겹치는 작업도 사람 손으로 해야 하고, 천연의 결점이라 불리우는 나무의 옹이가 불규칙하게 나오다 보니 자동화에 한계가 있다.

이건산업 생산현장에 합판이 쌓여있는 모습./사진제공=이건산업.

수입국 경쟁사들과 가격 경쟁에 불리한 구조인데, 여기에 국내 건설현장들이 '저급 합판'을 거리낌 없이 써 어려움을 더한다. 건설기술진흥법 등 여러 법이 기준에 맞지 않는 합판을 쓰면 건설업자 면허를 취소하거나 형사 처벌을 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단속도 약하고 품질검사 신고도 현재로서는 자율이라 건설 현장에서는 일부 합판만 KS인증 제품을 쓰고, 나머지 합판은 비인증 제품을 쓰는 등 꼼수가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합판의 수입·생산·유통은 주무 관청이 산림청이다. 국토교통부와 비교하면 건설현장 감시 기능이 현실적으로 약하다고 평가받는다. 한국합판보드협회가 자체적으로 단속하고 산림청이 시정에 나서 공사업자가 저급 합판을 폐기한 사례가 수두룩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베트남산(産)도 KS 인증을 받은 합판은 한장당 1만2500원, 안받은 합판은 6500원이다. 저급 합판으로 만든 거푸집은 내수성과 강도가 약해 시간이 흐르면 변형될 우려가 크다.

한국합판보드협회는 "저급 합판을 써도 제재받지 않으니 저급 합판 시장이 커지는데, 감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건설현장 필수재인 합판을 온전히 수입에 의뢰하면 종국에는 건설현장이 '요소수 사태'처럼 수입국에 크게 휘둘릴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김성진 기자 zk00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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