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는 대체 어떤 시대였단 말인가 [독서일기]
윤여일 지음
돌베개 펴냄
허윤의 전작 〈1950년대 한국 소설의 남성 젠더 수행성 연구〉(역락, 2018)와 〈남성성의 각본들〉(오월의봄, 2021)은 한국 근대문학이 국가와 민족을 수립하고 가부장제와 남성성을 확립하기 위해 수행했던 역할을 밝혔다. 반면 이번에 새로 나온 〈위험한 책읽기〉(책과함께, 2023)는 남성이 주도권을 쥔 국가와 민족 만들기 서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여성들의 저작과 독서가 주제다. 1908년, 고등여학교령이 공포되면서 한국 땅에 여성 교육을 위한 최초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지만, 여성이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면 여성의 본분인 가사, 양육, 노동을 등한시하는 것으로 비춰져 환영받지 못했다.
여성 교육이 제도화되면서부터 ‘교양 있는 여성’이라는 말도 함께 탄생했다. ‘교양 있는 남성’이라는 용어가 없는 만큼, 저 말은 여성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처럼 보이지만, ‘교양 있는 여성’의 실제 쓰임새는 남성이 독점한 지식과 권력으로부터 여성을 차단하는 효과를 갖는다. 해방 직후에 출간된 여러 여성 독본이 가리키고 있듯이, 여성의 교양은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을 양육하는 현모양처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성을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 교양이 아닌 젠더화된 교양의 테두리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교양 있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기획에는 글을 쓰고 읽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이 나타나 있다.
글쓰기와 책 읽기는 주체의 계기로 이어지기에 여성의 그것은 가부장 질서를 체현한 국가와 남성 헤게모니의 지도와 감독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가 이등객차에서 시집을 읽는 소녀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듯이, 오랫동안 남성들은 주체적인 글쓰기와 책 읽기를 시도하는 여성을 ‘문학소녀’라는 말로 폄하해왔다. 그러나 2015년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2018년 3월, 걸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화형식'을 당했던 것처럼(‘포토카드’가 불태워졌다), 현재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문학소녀가 맡아온 악역을 대신하고 있다.
윤여일의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돌베개, 2023)은 1990년대를 사상사와 문화사의 관점으로 정리하고 분석한다. 왜 2023년이 아닌 1990년대인가? 신림동 흉기 난동(7월21일)과 서현역 무차별 칼부림(8월3일)은 온라인 게시판에 살인 예고 게시글 354건을 양산했고, 경찰은 작성자 가운데 149명을 검거했다(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발표한 8월14일 통계). 윤석열 대통령은 영국 BBC 방송이 이 사태를 보도하면서 ‘묻지마’를 한국어 소리 그대로 ‘Mudjima’로 적은 것에 크게 감흥했는지, 제78주년 광복절 기념식 축사마저 ‘묻지마’ 식으로 하고 말았다.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왔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으로 민주화되고, 인권 의식까지 함양하게 되었다니 이 무슨 반체제적인 망발인가. 윤여일은 1990년대를 되짚어봐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1990년대는 현재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가 그 첫선을 보이고, 현재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다양한 의기가 출현하고, 현재 한국 사회의 갖가지 논쟁들의 밑그림이 그려진 시대였다. 2020년대 속에서 1990년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 1990년대의 시작점은 6월 항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낸 1987년이며, 그 성과는 지금도 ‘1987 체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1987년 체제는 1989~1991년에 벌어진 소비에트·동구권의 몰락과, 1997년 구제금융 사태(IMF)를 맞으며 질적으로 변했다. 1987년 체제가 개혁(혁명)이라는 시대적 임무를 품고 있었다면 1990년대에 나라 안팎에서 벌어진 두 사건은 1987년이 잉태한 모든 열망을 도로로 만들었다.
1990년대 초에 출현한 신세대론은 구제금융 사태를 기점으로 위력을 잃고, 신세대보다 10년이나 연상인 ‘386 세대’ 정치인에게 담론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만일 한국 경제가 1990년대 말에 그처럼 급속한 추락을 겪지 않았고, 사회불평등이 그토록 심화되지 않았다면, 신세대론의 운명도 이후의 젊은 세대 담론과 386 세대론의 양상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 대목은 변화를 욕구하는 2023년의 청년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반정치적이던 신세대는 정치로 훈련된 386 세대를 이길 수 없었다.
우리가 이탈리아의 길을 갈 거라고?
조귀동의 신작 〈이탈리아로 가는 길〉(생각의힘, 2023)은 여행 안내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각기 미국과 스웨덴을 닮고 싶은 선진국으로 꼽아왔다. 특이하게도 보수언론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한국이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을러왔다. 한국의 정치인 대부분이 포퓰리스트인 것은 맞지만, 노무현과 문재인만큼 재벌과 자본에 친화적인 ‘좌파’가 세상 어디에 있던가? 지은이는 한국이 그 어느 나라도 아닌 ‘이탈리아의 길’을 따라갈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다고 말한다.
이탈리아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나뉜 이중구조가 강하다. 일자리 지위는 연금 등의 사회복지 처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노동의 이중구조는 사회복지의 이중구조를 낳는다. 아파트 비중이 높은 것도 두 나라의 공통점이고, 청년들이 주거난에 시달리는 것도 유사하다. 심지어 이탈리아와 한국은 출산율과 혼인율이 가장 낮은 사회이기도 하다. 노동의 이중구조에서 밑변(중소기업·비정규직)을 차지한 사람은 자산·주거·교육·혼인·출산은 물론이고 복지에 이르기까지 자동적인 위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가장 강력한 사회계약인 중산층의 꿈을 허문다. ‘나도 중산층이 될 수 있어!’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생각의힘, 2020)에서 지은이는 한국 사회의 문제는 세대도 공정도 아닌 상위 10%에 속하는 이들의 ‘세습’이라면서, 세대 간 불평등이나 불공정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일수록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계급으로 굳어진 상위 중산층은 다른 계급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끼친다. 결집력 높은 ‘중산층 행동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증세에 저항하고, 교육과 부동산 정책에서 이득을 취한다. 먼저 상위에 오른 중산층이 뒤에 오는 중산층의 사다리만이 아니라 밥그릇까지 걷어차는 형국이지만,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모두 이들의 포로가 되어 있다.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더는 믿는 이들이 없는 기존 사회계약을 어떻게든 다시 써야만 할 것이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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