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친필 서명 '조선대장군', '좌익' 홍범도 만드는 명분에 이용되었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전문위원]
동방의 파리로 불리는 이르쿠츠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이르쿠츠크역 앞에서 시 중심가로 향하는 1번 트램을 타면 앙가라 강 위에 놓인 글라즈코브스키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를 건너면 5군단로를 만난다. 길을 부대 이름으로 명명했다. 격동의 시기 이르쿠츠크를 지킨 5군단이라는 이름은 시의 거리 명으로 남을 정도로 상징적인 부대였다. 이 5군단에는 특별한 부대가 있었다. 한인들만으로 구성된 특립 고려여단으로 오하묵이 여단장이었고 박승만은 여단 군정위원이었다.
20개 중대 2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소속된 고려여단은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을 딛고 여러 경로로 떠돌던 항일 독립군들이 모여 만든 부대였다. 조선인 항일 독립군들로 북적였던 5군단 거리는 굳이 러시아 말을 쓰지 않아도 소통되는 장소였다. 이 고려여단은 자유시의 비극을 치유하고자 했던 여러사람들이 노력한 결과였고 그 대표자가 홍범도 장군이었다.
왜 시베리아의 자유시에 한인 무장 유격대들이 모여들게 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19년 조선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3.1 독립 항쟁은 수 많은 조선인들의 의식을 깨워 일으켰다. 해외 각지에서 독립을 위한 결사체가 생기고 임시정부도 세워졌다. 당시 만주에는 1800년대말 간도 대이주시기부터 정착한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고 당연히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도 많았다.
일본제국주의는 안정적 조선지배에 위협이 되는 만주의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다. 이에 한인 무장 세력은 아무르강을 넘어 러시아 땅 시베리아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무장 독립운동의 두 세력이 대립하게 된다. 이른바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는 고려혁명군정회의는 시베리아의 모든 한인 무장세력은 자신들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상해파로 불리는 사할린 특립 의용대가 주축인 대한독립군단은 고려혁명군정회의가 조선독립보다는 한인 부대를 볼세비키 군대에 편입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고려혁명군정회의는 이에 맞서 대한독립군단이 민족주의에 경도된 반혁명적 노선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혁명이냐 민족이냐는 문제는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줄곧 따라다녔던 갈등이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이 두 세력은 한국독립투쟁을 지원하는 공산주의 국제연합(코민테른)에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대표를 보내려고 했다. 코민테른은 독자적인 조사를 진행해 무력 투쟁을 벌인 양측을 비난하고 양측이 같은 수로 임시위원회를 구성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어쨌든 자유시 참변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한인끼리의 갈등과 대립은 조선독립에 해가 될 뿐이므로 이 사태를 더 큰 상처 없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기 1년 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전쟁 영웅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대한독립군단에 대한 재판에서 홍범도는 재판관의 일원으로 참여해 대부분의 수감자들을 석방하게 했다.
일본제국주의 침탈 시기 많은 조선인들은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낸 러시아(소련)가 식민지 해방투쟁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천명한 것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분쇄를 통한 사회혁명이었다. 오늘날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은 철 지난 유토피아 이념에 빠진 어리석은 일로 간주한다. 하지만 18,19세기의 공산주의 이론은 답 없어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빛이었다.
신분제 사회의 강고한 틀에 갇혀 하인들은 감히 상전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는 일이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던 사회였다. 10대 초반의 아이들마저 하루 14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고 여성들이 투표를 한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징조라고 생각하는 시대였다. 이런 때에 등장한 해방이론이었던 사회주의는 유령처럼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부침을 거듭하다 무너진 소련이나 오늘날 이상한 국가 취급을 받는 북한의 모습만으로 공산주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펼쳐진 사상을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평가도 가능하다.
1925년 을지로 중국집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창립 선언문에는 사회주의 혁명 완수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제1강령으로 하고 있다. 일본 침략자들은 경악했고 암암리에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미소를 지었던 사건이었다. 일본 지배자들이 극도로 경계하고 싫어하는 집단이라면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이었던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생을 풍찬노숙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갔다. 안중근 의사의 공판기록에도 홍범도 장군이 등장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한 후 관동도독부 감옥에서 미조부치 다카오 검찰관이 작성한 신문조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검찰관 : 그러고는 어디로 갔는가?
안중근 : 웅기에서 북간도로 갔다.
검찰관 : 그다음에는 어디로 갔는가?
안중근 :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검찰관 :이범윤의 집에도 갔는가?
안중근 : 그곳에는 두세달 동안 있었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검찰관 : 그동안 최재형, 최봉준, 이상설, 이위종, 전명운, 이춘삼, 유인석, 홍범도 그리고 차도선을 만난 일은 없는가?
안중근 : 그곳에서는 홍범도만을 만났다.
검찰관 : 홍범도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안중근 : 함경도 의병의 거물이다.
동의회를 만들어 의병부대를 재조직한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안중근과도 만나 국내 진입작전을 모의하기도 했다.
함경도 의병의 거물에서 만주와 시베리아 독립군의 상징적 인물이 된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이듬해 모스크바로 갔다. 코민테른이 식민지 독립 투쟁에 나선 나라들의 혁명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한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에 참가한 56명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붉은 광장으로 이어지는 리콜리거리 7번지에서 19번지에 이르는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홍범도 장군은 숙소까지 찾아온 사절을 따라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다. 한인 대표자들 중 유일하게 소련의 최고 지도자를 만난 것이다. 레닌은 홍범도 장군을 만나 초청한 이유를 말했다. "우리 두 민족의 공동한 항일 투쟁에서 홍범도 동지가 세운 전투적 공훈을 높이 평가하여 사의를 표하기 위해 이렇게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룬 홍범도 장군의 항일 투쟁 성과는 모스크바 지도자들에게도 인상적이었으며 항일투쟁 전선을 이끄는 조선의 군사적 지도자로서 예우를 한 것이었다.
이 만남에서는 자유시 사건에 대한 대화도 이루어졌다. 홍범도 장군은 담담하게 자유시 참변에 대한 견해를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전달했다.
"저는 그 사변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변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정치에는 감각이 무딥니다.....고려혁명군사의회 조선 사람인 지도자들은 이르쿠츠파 사람들이고 사할린 특립의용군 지도자들은 상해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고려혁명군 사령관 갈란다라시월린은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의 말만 듣고 독립의용군 지도자들 중에서 몇사람을 고려혁명군군사의회 지도부 성원에 넣어 달라는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런 문제를 가지고 끝가지 연합에 반대해 나선 것은 사할린 독립의용군 지도자들의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할린 독립의용군이 연합을 반대한다고 해서 그 부대가 중령으로 넘어가려고 한다는 구실까지 꾸며가지고 무장해제 시키고....무장해제를 할 때에 100여명의 무고한 군인들을 죽게 한 것은 천인공노할 범죄적 행동이라고 인정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소련 지도자 레닌 앞에서도 소련의 정치 노선을 따르는 고려혁명군의 자유시 무장해제 사건에 대해 범죄적 행동이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군인으로서의 당당함을 바탕으로 항일 전선에 나서는 조선인들은 서로 간의 차이를 극복해 연대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 것이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정의 홍범도 장군 흉상을 옮기면서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묻는 것은 역사적 누명을 덮어 씌어 항일독립운동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홍범도 장군은 레닌으로부터 조선독립군 대장 예우에 준하는 선물을 받았다. 군용 외투와 군모, 권총과 금화 100루블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의 손에는 선물과 함께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대장"이라는 증명서가 들려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선물들이 나중에 홍범도 장군에 대한 배척의 사유가 되어버린다. 극단적인 이념대결이 펼쳐진 해방정국과 냉전 시대를 통과하면서 홍범도 장군은 잊힌 영웅이 되었다.
지금도 작은 기관이라도 방문을 하게 되면 기념품을 받게 된다. 하물며 유럽과 아시아에 뿌리를 내리고 주변 민족들과 연방을 이룬 러시아 최고 지도자가 초청자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일반적이고 당연한 관례이다. 다만 선물은 조선 항일 운동을 이끈 군인 홍범도 장군의 위상에 걸맞은 예우를 갖췄을 뿐이다.
홍범도 장군의 인간적 됨됨이는 그의 삶 곳곳에 배어있다. 장군은 민족종교로 불린 대종교에도 참여했고 단군을 기리는 단학회에도 관여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사상도 종교도 다투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심이 없었다. 레닌으로부터 받은 금화 역시 연해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위한 협동조합 조성기금으로 사용했다. 홍범도 장군은 자립적인 독립운동을 주장했다.
당시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은 동포들의 모금에 의존했다. 그러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은 고국을 떠나 막노동판이나 삭막한 농토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 민초들이었다. 이들을 찾아 우리는 독립운동을 하니 무기와 식량을 사게 돈을 내놓으쇼라고 말하기에는 동포들의 처지가 너무도 처량했다. 홍범도는 동포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협동농장을 일궈 나오는 소득으로 항일 운동을 하고자 했다.
공직에 나서면서도 주식 백지 신탁을 거부하거나 코인이니 주식이니 사욕을 채우는 투자에 눈이 먼 오늘날의 정치인들과는 격이 다른 인간이 홍범도였다. 이런 거인을 기리기는커녕 역사에서 지워버리자고 말하는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항일 투쟁에 나선 많은 이들이 빠르면 10대 초반 나이에 조선 해방에 몸을 던지겠다며 만주로 시베리아로 상해로 떠났다. 춥고 배고픈 광야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는 지역과 당파를 넘고 사상과 이념의 골을 지나 해방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왔다.
한 가지 사실을 더 부연하자면 일제 강점기 조선과 동아시아 곳곳에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의 삶을 짓밟았던 자들은 해방 후 반공 투사로 거듭났다. 친일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더 극심한 반공 투사가 되었다. 이들은 사상적 투사가 아니라 당대 권력의 대세를 따르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역사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너는 어느쪽이냐"는 살벌한 물음을 한반도 민중에게 던졌다. 그리고 70여년, 대한민국은 굳이 무엇이라 규정하지 않아도 다이나믹하게 변화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시점에 먼지가 뒤덮인 낡은 레파토리를 다시 꺼내 적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 김일성과 연대하고 평생을 투철한 공산주의 혁명가로 살았던 호치민의 무덤까지 찾아가 머리 숙여 참배한 대통령과 정부가 자국 독립운동 영웅을 좌익으로 몰아 역사의 뒤 켠으로 내모는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항일 투쟁에 평생을 바치면서 갈등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서로를 손 잡게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홍범도 정신이 그리울 뿐이다.
<참고도서>
김상웅, 『빨지산 대장 홍범도 평전』, 현암사, 2013.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돌베게, 2015.
박흥수, 『시베리아 시간여행』, 후마니타스, 2017.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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