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항전'인가 '쇼'인가…단식의 정치학
이재명 무기한 단식 돌입…정치인 단식 흔해
'결기' '정치쇼' 평가 엇갈려
[더팩트ㅣ신진환·송다영 기자] "윤석열 정권은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폭정 속에 무너지는 민생과 민주주의를 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한다.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맨 앞에 서서 사즉생의 각오로 무기한 단식을 시작한다."(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31일 윤석열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를 막기 위한 항쟁에 나선다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퇴행적 집권과 폭정, 정권의 무능·폭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최후의 수단으로 갑작스럽게 '단식'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여야는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이 때문인지 이 대표는 오래전부터 단식을 고심해 왔다고 한다. 한 지도부 관계자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이 대표가 단식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면서 "대통령이 숨어있다가 '1+1=100이라는 사람들이 있다'며 국민과 싸우겠다고 하니 이 대표가 행동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표의 단식을 두고 당 내부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한 초선 의원은 "이 대표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아니겠나"라면서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하는 단식하는 이라기보다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결단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다만 "단식 시기는 지금보다는 지난해, 더 빨랐으면 좋았겠다"고 덧붙였다.
비명(비이재명)계로 분류되는 윤영찬 의원은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나 "이 대표에게 가서 왜 단식하냐고 물어보라"며 "가장 잘 이해해야 하는 국민이 왜 단식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나"라고 의문부호를 붙였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이 대표가 검찰 출석을 앞두고 전국의 지지자들 앞에서 숭고한 단식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고 해석했다.
이 대표가 뜻을 관철할지는 미지수다. 그는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윤 대통령을 향해 △민생 파괴·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대국민 사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 반대 천명·국제해양법재판소 제소 △전면적인 국정 쇄신·개각을 요구했다. 하지만 협치가 실종됐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이 야당 대표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은 작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 대표가 곡기를 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재임 시절인 2016년 7월 7일부터 열흘간 정부의 지방재정 개편안에 반대하며 서울 광화문 앞에서 단식했다. 시장이었던 이 대표의 인지도는 이후 크게 올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이 대표의 단식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다. 여당은 이 대표의 단식이 뜬금없다면서 사법적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다.
'비폭력 투쟁'의 상징인 단식은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현대 정치사를 관통하는 거물급 정치인들도 중대 고비 때 단식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인 1983년 전두환 정권에 정치범 석방과 정치 복원 등 민주화 조건을 내걸고 23일간 단식 투쟁을 벌여 가택연금에서 풀렸다. 신군부의 탄압으로부터 정치적 활로를 연 것이다.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평민당 총재 시절인 1990년 10월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와 정당 추천제, 내각제에 반대하며 13일간 단식 농성을 벌였다. 원내 투쟁도 병행한 끝에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지방자치 도입을 끌어냈다. 현 지방자치제는 DJ가 극단적 방식으로 국민에게 호소해 쟁취한 셈이다. 이처럼 정치인의 단식은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야당 지도급 단식은 '정치쇼'와 '결기'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2016년 9월, 이정현 당시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는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본회의를 통과한 데 대해 반발, 정세균 당시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장소가 문제였다. 이 대표가 풍찬노숙이 아닌 당대표실에 머무르자, 야권은 '안방 단식 쇼'라고 트집을 잡았다.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는 2019년 11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철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포기',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8일간 단식했다. 당시 당 일각에선 황 대표가 리더십 부재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단식에 나선 것 아니냐며 진정성을 의심했다.
정치인이 단식한다면 상대 당의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민주당은 논평으로 황 대표의 단식에 대해 "떼쓰기, 국회 보이콧, 웰빙 단식 등만 경험한 정치 초보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황 대표의 남루한 명분에 동의할 국민이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정의당은 "곡기를 끊지 말고 정치를 끊기를 권한다"고 꼬집었다.
약 4년이 지난 현재, 국민의힘은 이 대표의 단식에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강민국 수석대변인은 1일 논평에서 "대단한 결단인 것처럼 나선 이 대표는 단식농성장을 수시로 비웠다고 하니, 이쯤 되면 '웰빙 단식'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라며 "자신의 비리 혐의를 덮기 위해 정기국회를 앞두고 예산안과 법안을 볼모로 삼으며 단식 쇼를 벌이는 야만의 정치에 나섰다"고 비난했다.
shincomb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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