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드라마 감독이 편집실에 방문한다…약속이 바뀌었다

한겨레21 2023. 9. 2.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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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성 청년 방송 비정규직이다]①드라마 편집팀 편
계약서도 없이 주 6일 10시간씩 일하고 250만원 받아…감독 일정 등에 근무시간도 달라져
9월3일은 ‘방송의 날’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가지만, 방송사 안팎은 각종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대본을 쓰고, 촬영하고, 녹음하고, 편집하고, 특수효과와 자막을 입히고, 색을 보정하고…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시간이 모여 방송이 이어진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방송 뒤편에는 저임금, 갑질, 폭언, 과도한 노동시간 등에 시달리며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열악한 위치에 있는 ‘청년 여성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환경과 이들이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일하는지에 주목했다. _편집자
2020년 4월 방송사들이 모인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거리 캠페인. 대책위 제공

드라마 편집팀에서 일하는 수정(가명)씨는 인터뷰 약속을 잡는 것부터가 힘들었다. 수요일에 잡으려 했던 약속은 화요일 밤 갑자기 감독이 편집실에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 바뀌었다. 드라마 감독이 언제 편집실에 방문할지, 드라마 촬영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에 따라서 일하는 시간도 조건도 바뀌었다.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는 환경이었다.

요즘 퇴사 생각을 하는 이유

수정씨는 영상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드라마 편집실에 들어갔다. 편집실에선 사람을 잘 구하지 않아 고민하던 중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공고를 통해 덜컥 일을 시작했다.

수정씨는 이렇게 바로 취업한 자신은 운이 좋은 거라고 했다. 방송 관련 일을 하고 싶어 ‘대기’하는 청년이 넘쳐나는 시기라고 했다. “드라마 편집실이 그래도 지금까지 했던 일들에 비하면 돈은 많이 줘요”라고 말하기에 얼마를 받는지 물어봤다. 250만원이었다. 하루에 10시간씩 주 6일 출근해서 받는 월급이어서는 안 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일을 시키고 이렇게 돈을 줘도, 편집실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 트럭이라고 했다.

편집실에서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찍은 장면을 실제 드라마 형태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이 과정에서 편집감독(편집기사)이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하는 것은 아니다. 수정씨 같은 편집보조들이 섞여 있는 촬영 데이터를 회차와 장면 순서에 맞게 정리하고, 쓸 수 있는 영상과 쓸 수 없는 영상으로 구분해 1차 편집을 한다. 1차 편집한 것을 가편집기사가 감독의 의도에 맞게 첫 번째 가편집을 하고, 이를 편집감독이 검토하고 다시 한번 편집한 뒤, 드라마 연출감독의 최종 확인을 거쳐야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90분짜리 영상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편집된 영상이 바로 방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종 후반 작업을 거쳐야 한다. 색상보정, 특수효과, 음향 등 필요한 후반 작업을 정리하고 각 업체에 영상을 보내 최종 결과를 확인하는 것까지가 편집실의 일이다.

“저는 요즘 들어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드는 거예요.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제 시간이 중요한데 그게 지켜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여기 그만두고 다음 일을 뭘 해야 할까 생각해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비정규직이잖아요. 변하지 않는 건 똑같으니까 그래서 버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여기는 버티면 계속 일은 할 수 있으니까.”

편집감독 돼서 부당한 시스템 바꾸고 싶어

편집실의 노동시간도 몇 시부터 몇 시까지라고 정해지지 않았다. 당장의 촬영 스케줄에 따라, 언제 연출감독이 편집실에 방문하는지에 따라 변동한다. 언제든지 일할 수 있도록 아이패드와 노트북을 챙겨다니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다. 친구와 밥을 먹다가도 노트북을 꺼내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잦았다. 작업량도 엄청났다. 90분짜리 드라마 한 편을 위해 찍은 영상은 보통 몇 시간이 훌쩍 넘는다. 모든 영상을 확인하고, 편집하고, 후반 작업까지 검토하려면 휴일에 출근해도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왜 편집실에 여자밖에 없는지, 남자는 왜 거의 없는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정말 바쁜 날에는 편집실에서 먹고 자고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데 남자가 있으면 불편하니까 그런 것 같더라고요. 저희 편집실에 샤워실도 있고 라꾸라꾸침대도 있고, 다 있어요.” 이곳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 편집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성이었다. 수정씨는 “그게 저에게는 편하기는 한데. 어떻게 보면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는 게 차별적 구조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라며 씁쓸해했다.

수정씨에게 혹시 근로계약서를 썼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역시나 쓰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구두계약이었다.방송계의 구두계약은 ‘노동조건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회사 마음대로 일을 시키겠다’와 비슷한 의미처럼 여겨진다.

“저는 영상이 좋고,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환경이 개선됐으면 좋겠어요. 저도 편집감독이 목표니까 부당한 걸 참고 버텨야지 생각하기는 하는데. 다들 네 꿈이니까, 방송 쪽이 원래 이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건 이제 그만둬야 하지 않나요?”

수정씨는 편집감독이 돼서 이런 부당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미래의 목표라고 했다. 앞으로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드라마 편집이 어떤 점에서 즐거운지 이야기하는 수정씨의 표정은 인터뷰 시간 중 가장 밝아 보였다. 하지만 수정씨도 이렇게 일하는 게 과연 맞는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든다고 했다. 수정씨가 바라는 것은 크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 보러 갈 시간을 낼 수 있는 것. 퇴근 이후 온전한 휴식 시간이 보장되는 것. 적어도 최저시급을 받는 것…. 꿈을 좇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일상이라 하기에는 가혹한 대가였다.

웰메이드 드라마는 무엇일까

무엇이 웰메이드(잘 만든) 드라마인지를 논할 때 그 결과만을 두고 평가해도 될까.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데 케이(K)-드라마, 케이-콘텐츠를 뜨는 산업이라고 밀어주는 게 맞을까.

박혜리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희망연대본부 조직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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