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인내심을 보상하리라” 왕의 DNA를 가진 와인 [전형민의 와인프릭]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돌려서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최근 초등 3학년인 아이 담임 교사에게 지도 지침을 보낸 교육부 사무관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A4 용지 1장 분량, 총 9개의 지침에는 자신의 아이를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고 소개하고, 사실상 특별대우를 해달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사안의 본질은 A씨가 ▲업무 시간 중 ▲공직자 메일을 사적으로 사용해 ▲소속 부처와 직접 연관이 있는 대상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지만, ‘왕의 DNA’ 같은 자극적인 문구가 부각돼 화제가 됐습니다.
일정한 분야나 범위 안에서 으뜸이 되는 것을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피구왕 통키나 축구왕 슛돌이, 제빵왕 김탁구처럼 한 주제 뒤에 왕을 붙여 그 분야 최고를 뜻하는 단어로 쓰기도 하죠. ‘-왕’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킹왕짱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영어로 왕을 뜻하는 킹(King)과 한글로 왕, 최고나 대장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짱을 합한 단어입니다. 최고를 뜻하는 온갖 수식어를 모아놓았죠.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한으로 갈리는 와인 업계에도 왕으로 군림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킹왕짱 와인’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도대체 어떤 맛과 향을 내길래, 이런 엄청난 수식어로 불릴까요? 오늘은 와인의 왕(The king of Wines)이자 왕들의 와인(The wine of Kings)이라 불리는 바롤로(Barolo)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탈리아 북서단 피에몬테(Piemonte)주(州)의 도시, 아스티(Asti)의 서쪽에 위치한 랑게(Langhe) 언덕과 그 주변 작은 마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에서 이미 11세기부터 와인을 양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당시 와인은 지금처럼 유명하지도 ‘바롤로’라는 고유명사로 불리지도 않았습니다.
바롤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 황제가 몰락하면서부터 입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북부의 사르데냐 왕국, 남부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이 공존하던 시기였는데요. 56년이 지난 1861년에서야 우여곡절 끝에 사르데냐 왕국이 최초의 통일 이탈리아를 완성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샤르데나 왕국과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열강들로부터 이를 인정 받기 위해 여러 외교 협상을 했어야 했습니다. 당시 지난한 외교 협상 테이블에 항상 올랐던 와인이 바로 토착 품종인 네비올로로 만든 바롤로였다고 하죠. 내수 시장보다 외교 무대를 통해 여러 해외 지도자들에게 먼저 품질을 인정받은 셈입니다.
특히 당시 사르데냐의 군주였던 사보이아 왕가의 카를로 알베르토(Carlo Alberto) 왕과 그 아들이자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왕으로 현대까지 ‘조국의 아버지(Padre della Patria)’라 불리는 성실왕(誠實王)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가 바롤로를 사랑해 개인 포도밭까지 조성하면서 ‘왕들의 와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기 시작합니다.
우선 만생종으로 10월말에 이르러서야 수확이 가능합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서야 장마가 쏟아지는 유럽 기후에는 좀처럼 수확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품종이죠. 장마를 우려해 일찍 수확한다면 늦게 익는 만생종인 탓에 덜 익은 포도가 되고, 품질을 걱정해 수확을 늦추다간 별안간 쏟아진 장마에 아예 포도 농사 자체를 망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과육 중 씨앗 함량이 높기 때문에 탄닌(Tannin) 함량이 높은 점이 양조자의 골머리를 썩힙니다. 포도 과실에서 탄닌은 껍질과 줄기, 씨앗 등에서 추출되는데요.탄닌은 일정량 이상이 되면 떫은 맛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양조자들은 항상 탄닌의 관리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다행히 껍질과 줄기는 양조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분리해낼 수 있습니다만, 씨앗을 일일히 발라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결국 양조자의 섬세한 기술과 적절한 숙성이 반드시 필요한 건데요. 바로 이 탄닌을 해결하기 위해 바롤로 양조자들은 보기 드문 장기 숙성을 강제합니다. 현재 법으로 바롤로는 포도 수확 후 출시되기 전까지 최소 38개월(오크통 18개월) 동안 숙성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합니다. 만약 좀 더 고품질이라는 의미의 리세르바(riserva) 라벨을 붙이려면, 총 숙성기간은 최소 62개월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죠.
어떤 전문가들은 심지어 ‘바롤로는 최소 10년을 숙성후 마셔야 한다’거나 ‘새로 출시된 바롤로 빈티지를 마시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단단한 바롤로의 성미가 조금 더 부드러워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설명인데요. 가뜩이나 포도 재배 단계에서도 극한의 예민충이었는데, 양조가 된 다음에도 이것저것 신경이 쓰이는 까다로운 녀석입니다.
이쯤되면 ‘이렇게까지 해서 마실만한 녀석이야?’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해서라도 제대로 맛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라는 쪽입니다. 그만큼 잘 만든 바롤로의 맛과 향은 매력적이거든요.
외관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바롤로는 그동안 와린이 여러분이 주로 보던 짙은 자줏빛의 와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환히 비치는 투명하고 영롱한 루비색을 자랑하죠. 게다가 숙성될수록 묘한 오렌지색으로 변합니다. 투명한 와인잔에 따라놓고 보면, 외관만으로도 절로 우아함이 느껴집니다.
이 외에도 타르와 바닐라, 삼나무, 그을린 나무, 숲바닥, 가죽 등의 풍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엇 하나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고, 적절한 조화를 이뤄냅니다. 그러는 와중 최소 38개월 이상 숙성됐음에도 여전히 신선한 산도를 자랑해 입속에서 텁텁하거나 지저분한 느낌도 들지도 않습니다.
바롤로는 와인만 마셔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적당한 음식과 함께라면 세상만사가 부럽지 않습니다. 바롤로와의 페어링에 빠지지 않는 음식은 트러플이 들어간 파스타입니다. 마침 피에몬테는 최고의 화이트 트러플 산지이기도 하죠. 와인은 그 지역 음식과 찰떡궁합이라는 게 다시 한번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이 외에도 포르치니(버섯의 종류)를 활용한 리조또나 소고기와 양고기 등 다양한 고기류와도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줍니다. 특히 우리나라식으로 불에 구워낸 담백한 고기는 물론, 여러 소스가 들어가 풍미가 가득한 고기류와도 잘 맞습니다. 가히 왕의 식탁에 오를만한 섬세하고 복합적인 와인입니다.
사무관 행실 자체의 잘못과 별개로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악용한 사이비, ‘제2의 안아키’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만약 이런 사이비가 처음부터 준동하지 않았다면, 사무관의 잘못된 행실 역시 없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행히도 오늘 얘기한 바롤로는 이런 사이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포도의 재배부터 양조 후 숙성까지 세세하게 법으로 모든 절차가 정해져있고, 엄격하게 관리되기 때문입니다. 와인의 왕이라는 명성을 지키기 위한 이탈리아 정부의 노력이기도 하죠.
아울러 바롤로는 세상에서 가장 타협을 모르는 와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탈리아 와인 중에서도 비교적 비싼 가격을 자랑하지만 오랜 기간 숙성을 통해 본연의 맛을 발휘하기 때문에 사이비를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만드는 노력에 비해 수익이 타산이 맞지 않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자신을 가두고 연성한 끝에 꽃피운 와인의 왕, 강건하지만 섬세한 복합미가 살아있는 매력적인 왕의 와인, 타협을 모르는 원리·원칙으로 도도하게 그 전통을 이어나가는 바롤로와 함께 왕의 품격을 느끼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바롤로를 구매하신다면, 구매처에 해당 바롤로가 어떤 스타일인지를 물어보세요. 만약 클래식 스타일이라면 적어도 1시간 이상 브리딩(breading·와인을 공기에 노출시켜 산화시키는 것)을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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