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전위예술의 회고전 《바위가 되는 법》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치의 미적 효과 담아
(시사저널=반이정 미술 평론가)
무료 개방에 2주치 예약이 모두 꽉 차 암표까지 나돌았던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 《We》 이후, 리움미술관이 내놓은 후속타는 김범의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7월27일~12월3일)이다. 카텔란 개인전처럼 작가의 예술세계를 중간 정리하는 성격이니만큼, 30년 전 초기작 등 구작의 편성률이 높다. 그 말은 1990년대 우리 미술계의 한 흐름을 환기시키는 전시라는 의미다.
김범의 창작 연대기를 정리한 전시장의 첫인상은 황량한 느낌을 준다. 큰 평수에 높은 천장의 리움미술관 스케일이 대비감을 더 크게 만든다. 김범의 작업 대부분에 쓰인 재료를 보자. 채색되지 않은 미색 캔버스, 실, 철사, 돌, 흰 종이, 스티로폼, 연필, 잉크 등등. 대부분이 무채색으로 통일된 재료고 작품 사이즈도 작다. 캔버스 천과 흰 종이, 검정 펜, 연필처럼 미술의 기본 재료만으로 완성된 작품은 미의 최소주의로 요약된다. 본디 최소한의 제스처로 최대의 미적 효과를 뽑아내는 게 고수다. 김범 개인전은 일견 묵직한 관념적 주제를 간판으로 내걸고 스펙터클과 작품 규모를 과시해온 비엔날레형 전시의 외형과 대척점에 있다.
희소한 가치와 유머 담은 개념미술
듬성듬성 벽과 바닥에 놓인 채도 낮은 김범의 소품들을 보고 있자니, 1990년대 중후반께 소수의 미술가들이 주도한 국내 개념주의 미술 경향의 한 시절이 스쳐 지나간다. 김범이 일관한 개념주의 색채는 최소주의 미학을 통해 과유불급으로 향하는 동시대 미술 스케일과 의미 중심주의에 대한 선 긋기였다고 본다. 나아가 미술(계)을 지배하는 통념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점에서, 미술에 관한 미술, 즉 메타미술로 규정할 수 있다. 개념주의 미술의 명맥이 끊긴 건 아니지만, 오늘날 미술판의 흐름은 시장 선호도가 높고 환금성이 높은 작품과 볼거리 지수가 높은 작품이 주도한다.
미술의 공식은 실물을 허구로 재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말을 뒤집으면 허구로 재현된 미술을 보고 실물을 본 것인 양 속아주는 게 관객의 인습적 반응이란 뜻이다. 감상은 그렇게 완성된다. 김범의 2001년 그림 《현관 열쇠》는 캔버스 천에 검정 아크릴로 산세를 그린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열쇠에서 물결무늬 홈 부분만 크게 떼어 그린 것일 뿐인데 흡사 능선으로 이어진 산 풍경처럼 보인다. 작품 제목이 명시하듯 현관 열쇠임이 분명하지만, 관람자는 열쇠의 홈이 파인 부분으로부터 능선이 늘어선 산 풍경을 떠올린다.
탁자 위 다리미, 라디오, 주전자를 얹은 설치작품의 제목은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2002)다. 각 사물을 자세히 보면 라디오는 바닥면에 다리미의 열판이 부착돼 다리미 기능을 하고, 다리미는 구멍이 뚫린 열판의 앞부분으로 물을 부을 수 있어 주전자의 기능을 하며, 주전자는 안테나가 부착돼 라디오의 기능을 한다. 외관과 명칭이 불일치하는 이 블랙코미디 작품도 미술 재현의 공식을 제멋대로 뒤튼 점에서 일관된 미학을 따른다.
작품을 감상할 때 공들여 자세히 보라는 교과서적 조언이 있다. 이 조언은 세부 묘사가 중요하고, 그림 속 도상들의 의미를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는 옛 그림에는 통하는 감상법으로서 맞다. 하지만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작품의 진가는 대개 첫인상에서 결정될 때가 많다. 작품의 우열을 가르는 심사 현장에서조차 좋고 나쁨은 거의 단번에 이뤄진다. 김범의 전작은 허망할 정도로 간결한 이미지와 단조로운 색조로 구성됐지만, 맥락을 짚으려면 주의 깊은 관찰이 요구된다. 정확히 말하면 내공이 쌓인 관객만이 진가를 알 수 있다. 전시장 초입에 배치된 《볼거리》(2010)는 쫓고 쫓기는 동물 세계를 다룬 영상물로 간주하고 휙 지나칠 법한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게 워낙 빠른 속도로 두 동물이 초원을 내달리며, 《동물의 왕국》이라는 기성 영상의 품질이 워낙 저화질이어서 맥락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한데 이 작품은 영상 편집술을 이용해 초식동물 영양과 육식동물 치타의 쫓고 쫓기는 위계를 바꿔치기한 작품이다. 즉 영양이 치타의 뒤를 쫓는 장면처럼 편집해 놨다. 이런 블랙코미디 설정처럼 김범은 세계의 자연스러운 규범과 통념을 천연덕스럽게 뒤집어 내놓는 걸 자신의 미적 개념으로 정한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 인기가 높은 작품은 31분 정도의 영상물 《"노란 비명" 그리기》다. 미술 창작 기술을 시청자에게 쉽게 가르치며 인기를 끈 TV 프로그램 《밥 로스, 그림을 그립시다》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미술 강사로 출연한 연기자가 밥 로스의 방송 멘트로 알려진 "어때요. 쉽죠?"를 중간중간 따라 하면서, 그림에 감정을 입히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내용이다. 노란 물감의 붓이 캔버스에 닿을 때, 붓과 캔버스 사이에 갖가지 비명을 지르면 그림에 감정이 입힌다는 내용이다. 이는 '미술 작품에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다'는 세간의 통념을 풍자한 작업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됐을 당시에도 인기가 좋아 비엔날레 본 전시장이 아닌 광주 대인시장의 허름한 공간에 전시됐음에도 입소문이 났었다. 이 작품이 팝아트로 분류되진 않지만, 동시대 예능 문화를 차용해 현재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중문화를 전유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부친 김세중 작가와 작품세계 차별화
김범은 작가의 미적 관점을 개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를 고르다 보니, 고정된 장르에 묶이지 않고 평면과 입체, 미디어, 설치 등 장르를 오가는 창작을 이어왔다. 시선을 사로잡는 색의 마술에 관심을 두지 않아 무채색 작업이 많고, 찢어지기 쉬운 종이와 부서지기 쉬운 스티로폼 등 소장하기에 까다로운 재료를 골라 작품을 만들었다.
1968년 서울 세종로에 건립돼 55년째 비바람과 태풍에도 끄덕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이순신상은 국내 대표 공공조형물이다. 조선 중기 무신 이순신의 충성심을 재현한 주제의식은 선명하고 청동을 재료로 써서 보존성도 높였다. 반면 스티로폼, 실, 각목, 철사, 기성품 등을 결합해 소품을 만든 김범은 21세기 이후 자기 색채를 고집한 개념미술의 입지에 있다. 이순신상을 만든 김세중 조각가와 리움 개인전을 연 김범이 부자 관계라는 건 많은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다. 미술은 변한다. 각 시대는 당대의 미감에 맞는 예술을 출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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