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조선인 학살 100주기, 추도비 인근선 버젓이 역사수정 집회[기자의눈]
행정이 부재한 공간, 혐오·차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지켜
(도쿄=뉴스1) 권진영 기자 = "두 번 다시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저도 그렇고 우리 애들도. 100년 전 일을 똑바로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를 맞이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그 표적이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같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허리춤에 "조선인 학살 역사 수정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팻말을 찬 호소카와(69)씨는 또박또박, 단호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그의 뒤편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쿄도 요코아미쵸 공원 내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둘러싸고 "레이시스트(인종차별주의자)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외쳤다. 외침은 공원 밖까지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혐오를 내쫓으려는 이들의 분노
이들의 정체는 각종 혐오·차별 발언에 맞서 싸우는 이른바 '카운터' 활동가들이다.
왜 공원에 나왔냐는 기자의 물음에 호소카와 씨는 "학살의 역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역사를 수정하려는 우익이 저 추도비 앞에서 집회를 연다고 했다"며 "그건 유대인 추도비 앞에서 네오나치가 집회를 여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어 "옳고 그름의 얘기가 아니라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추도비를 지키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호소카와 씨와 카운터가 그토록 내쫓고 싶었던 대상은 '일본 여성의 모임 소요카제(そよ風)'. 이 단체는 지난 8월 자체 블로그에 9월1일 간토 대지진 100주기를 맞아 '진실의 위령제'를 개최한다는 홍보문을 올렸다. 위령제를 열겠다는데도 카운터들이 화가 난 이유는 무엇일까.
소요카제 측은 표면적으로 조선인이 학살됐다는 역사적 사실은 일단 인정한다. 하지만 희생자의 규모가 6000명에 이르지 않았으며, 조선인이 실제로 비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변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와 가해자의 논리를 현대 일본 사회에 재확산하고 있는 셈이다. 위령제라는 집회 명목은 그래서 더 교묘하고 악의적인 혐오다.
이날 오전 추도비 앞에서 추도 식전을 기획한 미야카와 야스히코 일조협회도쿄도연합회 회장은 "애초에 이 공원이 무엇을 위한 공원이냐"고 반문했다. 시종일관 담담하게 인터뷰를 이어가던 그가 유일하게 언성이 높인 부분이었다.
미야카와 회장은 "희생자분들을 기리기 위한 공원에서 사람의 인격을 훼손하는 집회를 인정해도 되느냐"며 집회 허가를 내준 도쿄도를 비판했다.
◇도쿄도가 은밀하게 혐오에 편승하는 방식
도쿄도는 2019년, 집회 도중 "조선인이 지진 재해에 편승해 약탈과 폭행을 했다"고 한 소요카제의 발언이 '헤이트 스피치(혐오·증오 발언)'라고 공식 인정했다. 도의 인권존중조례에 따른 판단이었다.
혐오 발언 전력에도 불구하고 소요카제는 이번 9월1일 집회 신청에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집회 안내 글에 버젓이 "조선인이 비행을 저질러 살해당했다"는 왜곡 주장이 실려 있어 혐오 발언을 반복할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도쿄도청 측에 문의한 결과, 도는 혐오 발언을 한 단체의 집회에 대해 별다른 규제나 단속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청 관계자는 "헤이트 스피치 심사 위원회는 두고 있지만 단체명은 공표하지 않는다. 단 인권조례 제11조에 '공공장소 이용 제한' 항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제한'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방임에 가깝다. 공공장소의 시설 관리자의 판단에 맡긴다는 것이 골자이기 때문이다.
관계자는 "공공장소 시설 관리자가 만약 혐오 발언 집회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되는 경우, 도청의 헤이트 스피치 심사 위원회에 '의견 소개' 자문할 수 있다"면서도 자문 결과에 따라 집회를 허가할지 말지는 시설 관리자의 몫이라고 했다.
"인권부 심사 위원회는 '거절하는 게 좋겠다'는 답변은 하지 않는다"는 도청의 설명은 결국 시설 관리자가 알아서 하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카운터 활동가들 역시 도쿄도의 책임을 강력히 추궁했다.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는 한 재일 한국인 카운터 A씨는 "판단을 보류한 채로 혐오를 용인하는 것이다. 혐오를 뒤에서 밀어주는 (일이므로) 비겁하다"고 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 도지사와 소요카제의 유착 가능성을 지적하는 이도 있었다. 고이케 도지사는 취임 후 7년째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별도 추도문을 내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아무개 씨는 "우리도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막아야만 하니까 온 건데 사실 진짜 그들을 막아야 할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국가와 경찰, 도쿄도다. 사용 금지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것 아니냐"고 했다.
호소카와 씨는 고이케 도쿄 도지사가 이전 소요카제에서 강연한 이력이 있다며 "도지사는 소요카제의 동료다. 원래 (집회) 허가를 내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날 경찰 측은 충돌을 막기 위해 집회 중 소요카제 측의 구호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카운터의 목이 쉬지 않으려면
"우리(카운터)가 안 해도 나라가 제대로 헤이트 스피치를 단속하고 다 함께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우리가 여기서 반대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집회 참가자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변호사 A씨는 이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공교육을 통한 '정부의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민의 힘으로만 하기에는 아무래도 벅찬 부분이 있다. 정부와 언론이 공적인 장에서 다뤄준다면 대중적 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추도 식전 참석을 위해 교토에서 올라온 전직 교사 히가시야마 이즈미 씨는 "교과서 내용이 상당히 왜곡되고 있다"고 우려하며 "최근 K팝 등 젊은 사람들 사이 친근감은 커졌지만 역사를 제대로 알고 난 다음에 새로운 교류를 쌓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 전통의복 차림의 66세 B씨는 기자에게 신문을 스크랩한 수첩 두개를 꺼내 보였다. 손바닥만한 수첩에는 신문 조각과 함께 곳곳에 메모가 빼곡했다.
B씨는 "직접 겪지 않아도 지식이 있으면 된다. 나도 겪지 않았지만 지식으로 배워 알고 있고, 이렇게 나와서 직접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realk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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