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인 ‘해변 주짓수’를 내 고향 포항에서 [ESC]
하와이·발리 배경 매혹적 영상
제주·부산·강릉에서도 이벤트
고향 모래사장 대련에 ‘안도감’
3년 전 친구가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나를 보자마자 흥분해서 말했다. 호놀룰루의 해변에서 주짓수 하는 사람들을 봤다는 거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인상적인 광경이었는지 그는 갑자기 주짓수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입이 아프게 영업할 때는 관심도 없더니….
친구가 해변 주짓수에 반한 이유는 짐작되고도 남았다. 입문자 시절내가 본 해변 주짓수 영상이 그랬기 때문이다.고도가 절정인 태양 아래서의 롤링(보통 스파링보다 낮은 강도의, 부드러운 대련), 어김없이 등장하는 플라잉암바(뛰어올라 상대에게 매달리면서 팔을 꺾는 동작) 같은 화려한 기술, 도복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드는 광경은 자유분방하고 이국적인 여름 이미지 그 자체였다.
물론 해변 주짓수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주관하는 국제브라질리언주짓수연맹(IBJJF)이 채택한 정식 종목은 아니다. 주짓수를 재미있게 수련하는 방법의 하나로, 해안가에 있는 주짓수 커뮤니티들이 재미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여름 한 철 색다른 환경에서 주짓수를 즐기고 싶은 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가 됐고 이를 촬영한 영상이 에스엔에스(SNS)에서 인기를 끌었다. 모래사장에서 수련하는 까닭은 격투기 종목의 특성상 딱딱한 바닥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푹신한 모래사장에서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그래서 해변 레슬링과 해변 킥복싱도 있다. 특히 해변 레슬링은 정식 종목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저변이 넓다.
잊고 있던 나의 바다
여름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친구에게 언제쯤 해변 주짓수를 해보겠느냐고 푸념했다. 그러자 그가 대뜸 말했다.
“본가에 가면 되잖아!”
지금도 해변 주짓수 하면 하와이, 캘리포니아, 발리부터 떠오르지만, 친구의 말대로 아무 해변에서나 수련하면 그만이다. 반드시 유명한 곳에서만 롤링하라는 법은 없다. 근래 우리나라에도 주짓수 인구가 늘어나면서 제주, 부산, 강릉의 해수욕장에서 주짓수 대회나 이벤트성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 고향 포항이라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내가 아는 가장 익숙하고 만만한 바다.
사람의 내면에는 저마다의 지형이 있다. 운이 좋으면 태어나면서부터 지형의 등고선을 발견하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 그것을 찾아 헤맨다. 성인이 되어 서울에 왔을 때 나는 드디어 내면의 풍경과 일치하는 곳에 편입된 것 같았다. 편의, 개인주의, 쉴 새 없어 몰아치는 변화 속에서 단단한 돌 위로 흐르는 물처럼 편안해졌다.
반면 경북 포항에서는 공단의 거대한 굴뚝과 중학생 때부터 입시를 치르느라 야간자율학습에 강제 동원됐던 기억뿐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던 시절에도 그런 삶은 너무 실망스러웠다. 거기에 이곳 사람들이 ‘지역 정서’라고 부르는, 전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도 크게 한몫했다.
근 1년6개월 만의 귀향은 주짓수 때문이었다. 이미 현지의 조력자도 있었다. 포항에서 6년째 주짓수 도장을 운영하는 정제혁 관장은 보통의 지도자들과 다르게 체구가 아담한 편이고 웃을 때마다 입보다 눈꼬리가 먼저 웃는, 육아 경력이 50일쯤 된 ‘초보 아빠’다. 그는 휴가 내내 자신의 도장에서 수련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즐기고 와, 주짓떼라!(주짓수를 수련하는 여성을 뜻하는 말)” 친구도 나서서 등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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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고 습하고 시선도 부담스러웠지만
포항의 주짓수 도장에는 중고등학생 수련자가 많았다. 성비는 남성이 압도적이어서 남자 학교에 온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문득 이곳이 은퇴 선언으로 팬들을 울린 ‘코리안 좀비’ 정찬성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과거가 퇴적층처럼 쌓인 고향, 그곳과 완벽하게 분리돼 존재하던 주짓수가 어색하게 만났다. 사실 주짓수가 아니어도 고향은 항상 어색한 곳이다. 외지에서 변한 나와 근원적으로 변하지 않은 내가 서로 엉클어진다.
그러나 고작 사흘 만에 어색함은 익숙함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들었다. 밤 9시에 시작하는 주짓수 수업을 기다리다가 잠든 초저녁, 선풍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텔레비전이 혼자 떠드는 시간.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방학을 맞은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주말이 왔고 가까운 해수욕장에서 관장님과 만났다. 포항에 도착한 날부터 말썽이던 날씨는 이른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다. 시시각각 얼굴을 바꾸는 해안가의 변덕스러운 기후를 완전히 잊었던 게 패착이었다. 해변 주짓수는 기대만큼 새롭거나 즐겁지 않았다. 덥고 습한 건 물론이고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이마저도 예상했던 걸까. 한편으로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언제나 크고 작은 실망을 안기던 곳이 갑자기 새롭고 즐거운 추억을 주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그보다 정체된 줄로만 알았던 고향에서 변화를 감지한 게 뜻밖이었다. 서핑 실력이래 봤자 보드 위에 엎드려서 종일 파도만 기다리는 게 고작이지만 그 잠깐의 즐거움을 찾느라 낯설고 먼바다를 돌아다녔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전국에서 손꼽히는 서핑 포인트가 바로 포항에 있었다.
또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갯마을 차차차’ 촬영 장소와 새로 개발 중인 관광지로 인해 무미한 줄만 알았던 고향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수련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와도 좋다는 조력자도 있지 않은가.
친구가 전화로 소감을 물었다. 나는 끔찍했던 날씨와 실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개방감에 관해 떠들었다.
“또 갈 거지?”(친구)
“주짓수에서 상대를 밀고 싶으면 당기고, 당기고 싶으면 밀라고 가르치거든? 이번이 당길 때였던 거 같아.”(나)
수련자들은 상대와 거리 조절만 잘해도 주짓수가 한결 쉬울 거라고 한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요령을 터득하는 일이 쉬울 리 없고 게다가 작용하는 방식도 복잡하다. 어쩌면 실망만 가득한 과거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게 곧 화해인지도 모른다, 쉽지 않아도 계속 노력해야 하는.
“꼭 한물간 연애 코칭 같은데….”(친구)
잠시 후 내가 말했다.
“그래도 그게 유용하긴 해.”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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