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물과 보리·석탄이 빚은 술 [ESC]
발베니·글렌피딕 증류소 있는 곳
보리가 좋다. 한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저녁이면 차가운 보리차에 밥을 말아 씻은 김치와 함께 먹는다. 보리밥을 지어 열무김치와 고추장만을 넣고 비빌 때도 있다. 구덕구덕 마른 조기를 통보리 속에 묻어두고 숙성시킨 보리굴비는 귀한 이들과 함께할 때 먼저 떠올리는 음식이 되었다. 곡물 보리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보리새우나 보리 숭어도 늘 반가운 것이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정작 보리를 가장 자주 접하는 계기는 술이다. 봄여름에는 맥주, 가을과 겨울에는 몰트위스키. 보리를 가공한 맥아(malt)가 맥주와 몰트위스키의 주재료가 된다.
여름의 끝에서 전화를 받았다. 직장을 옮기고 나서 처음으로 휴가를 내게 되었는데 혹시 함께 스코틀랜드에 갈 수 있겠냐는 친구의 제안이었다. 스코틀랜드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환해졌다. 동시에 그곳 지도를 나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먼저 스페이사이드 지역에는 발베니와 글렌피딕 증류소가 있다. 캠벨타운의 스프링뱅크, 하이랜드의 글렌모렌지, 로우랜드의 오켄토션, 그리고 서쪽 바다의 아일라섬에는 아드벡과 라가불린. 다만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친구와 함께 위스키를 마시며 언제 한번 적어도 삶이 끝나기 전에 스코틀랜드의 증류소들을 돌아보자고 굳은 기약을 나누었을 뿐.
휴가 기간이 얼마나 되냐는 물음에 친구는 5일이라 답했다.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친구는 당연히 자기도 못 갈 거 아는데 그냥 답답해서 한번 말해본 거라 했다. 얼마간 흐른 침묵을 깨고 이번에는 내가 제안했다. 우리 함께 태백에 가자고. 어쩌면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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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태백은 고원 산지에 자리한 도시다. 덕분에 8월에도 한낮 최고기온이 25도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여름밤에는 가장 이르게 가을이 찾아온다. 빛 공해가 적어 밝고 넓은 은하수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주요 은하수 관측 지점들까지 차량으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백 하면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석탄.
석탄은 탄소 함량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진다. 순도 90% 정도의 무연탄(無煙炭)은 말 그대로 연소 시 연기가 나지 않는다. 반면 주로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유연탄은 80%가량의 역청탄, 70%대의 갈탄 그리고 60% 내외의 이탄으로 나뉜다. 국내에서 채굴되던 석탄은 대부분 무연탄, 과거 가정에서 흔히 사용된 연탄의 주재료다. 역청탄과 갈탄은 시멘트 산업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여전히 중요한 원료로 쓰인다. 그리고 가장 순도가 낮은 이탄.
토탄 혹은 ‘피트’라고도 부르는 이탄은 땅속이 아닌 들판과 습지에 있다. 뿌리째 떠낸 잔디나 진한 색을 가진 진흙처럼 보인다. 자연히 채취를 위해 어두운 갱을 파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스코틀랜드에 내리는 비는 이탄 지대를 통과한다. 이 물로 푸른 보리를 기르고 위스키를 만든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각 증류소에서는 발아된 보리를 건조할 때 이탄을 연료로 태운다. 마치 목초액 같은 몰트위스키 특유의 훈연향이 이 과정에서 입혀진다. 물론 지역마다 이탄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다. 아울러 증류된 위스키를 어떤 나무통에 담아 얼마나 숙성하는가와 배합의 여부 등에 따라 저마다 고유한 개성이 만들어진다.
물은 고이면 썩고 술은 고이면 익는데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지금 우리가 저마다 견디고 또 버티고 있는 노력의 시간은 무엇을 만들어 낼까. 나도 친구도 여행 내내 답을 구하지 못했다. 출근을 하루 앞두고 친구는 태백역에서 기차를 타고 먼저 서울로 돌아갔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모습 위로 한층 두터운 기약이 쌓였다는 것이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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