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호화 작품도 ‘쓴맛’… 한국영화 봄날 언제쯤 [S 스토리-위기에 놓인 한국영화]

엄형준 2023. 9. 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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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더 문’ 등 ‘빅4’ 합쳐 관객 1000만 겨우 넘겨
2023년 개봉작 중 점유율 38.5% 그쳐
코로나 기간 제외 2004년 이후 최악
비싼 비용·깐깐해진 영화 선택 기준 등 이유
외화는 반등… 특별관 인기로 극장은 ‘훈풍’
“작품 다양성 키우고 극장 상생안 고민해야”

“여자 친구와 엘리멘탈 보러 왔어요. 여자 친구는 두 번째 보는 거고요.”

지난달 29일 낮. 한산한 풍경의 서울 용산구 한 극장에서 만난 전기범(25)씨는 “한 달에 한두 번 극장에 오는데, 평이 좋은 영화를 주로 본다”면서 이처럼 말했다.
관객 감소로 한국영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8월 31일 낮 서울 용산구 한 영화관이 한산한 모습이다. 이재문 기자
극장가 최대 대목으로 꼽히는 올여름 시즌의 진정한 승자는 한국영화 ‘빅4’가 아닌, 여름 시즌을 노린 영화도 아닌,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이란 얘기가 나온다. 6월14일 개봉한 엘리멘탈은 뒤늦게 입소문을 타며 7∼8월 두 달간 536만 관객을 모아 관객 동원력 1위를 기록했다. 엘리멘탈의 누적 관객은 현재 705만명이다.

블록버스터 여름 한국영화 ‘빅4’로 기대를 모았던 ‘밀수’,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누적 관객은 8월 말까지 4개 영화를 모두 합쳐 1004만명으로 가까스로 1000만 관객을 채웠다. 불과 몇 년 전 1개 영화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스코어다. ‘밀수’가 흥행에 성공해 500만 관객을 넘겼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345만명으로 손익분기점인 380만 달성을 향해 힘겨운 걸음 중이다. ‘비공식작전’과 ‘더 문’은 손익분기점이 600만명을 넘지만 각각 105만명과 51만명이 관람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왜 이렇게 저조한 스코어가 나오는 걸까. 이날 극장에서 만난 영화 마니아 김진구(40)씨는 “웬만한 영화는 다 극장에서 보고 여름 빅4도 모두 봤다”면서 “한국영화들이 예전의 형식이나 내용을 답습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아쉬워했다. 김씨처럼 모든 영화를 보는 경우는 이제 드문 케이스다. 그래도 극장을 찾는 이들 중에선 여름에 개봉한 한국영화를 한 편쯤은 본 이들이 꽤 되지만,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훨씬 까다로워졌다. 더 심각한 건 아예 극장을 찾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직장인 김홍구(48·가명)씨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극장 가본 지 오래됐다”면서 “요즘은 가족과 영화를 보러 가면 비용 부담도 되고, 보고 싶은 영화도 딱히 없다. 인터넷동영상서비스(OTT) 신작도 다 못 본다”고 말했다.
#현실이 된 한국영화 위기론

한국영화에 대한 위기론은 이제 현실이 됐다. 연초 설 명절 흥행 성적을 보는 불안한 시선은, 반년이 다 지나도록 제대로 된 흥행작이 나오지 않으면서 우려로 바뀌었고, 여름 시즌마저 기대에 못 미치면서 이제 근심이 됐다.

한국영화에 대한 걱정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여름 흥행 실적뿐 아니라 전반적인 통계 수치가 한국영화의 위기를 보여준다.

일부 관객 수 부풀리기 논란에도, 현재 우리나라 극장 통계 중 가장 신뢰할 수 있고 투명한 건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 통계다. 여기엔 영화관 입장권 판매·예매 수치가 실시간에 가깝게 집계, 반영된다. 통계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덮치기 직전인 2019년은 우리나라 극장 영화의 최전성기였다. 당시 영화관 연간 누적 관객 수는 2억2667만여명, 누적 매출액은 1조9139억원으로 각각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한국영화도 매출액 기준으로 사상 최고인 9707억원을, 관객 수는 2013년과 2015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1억1562만명을 기록했다. 그해 한국영화의 점유율은 51%, 외국영화는 49%다. 갑자기 등장한 코로나19가 한국영화의 숨통을 조이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2012년 이후 매해 누적 관객 1억명을 넘기며 영원히 호황을 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다 코로나19 집단 감염 후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정부가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시행하며, 2020년 영화관 관객 수는 5952만명으로 전년 대비 4분의 1 토막이 났다.
한국 영화계가 저조한 흥행 실적을 내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31일 서울 한 영화관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재문 기자
한국 영화계는 이 최악의 해가 지나면서 회복을 바랐지만, 상황은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2021년 전체 관객은 6053만명으로 전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는데, 한국영화 관객은 전년 4000만명에서 1800만명까지 뚝 떨어졌다. 최악의 해를 보내고 2022년 전체 관객은 1억1602만명으로 코로나 발생 전 대비 52%까지 회복했고, 한국영화 관객도 6279만명으로 회복세를 탔지만, ‘반짝 반등’이었다.

이미 올해 3분기도 한 달여만을 남긴 지금, 극장 전체 관객 수는 8663만명이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올해 연간 관객 수는 약 1억3000만명으로 지난해보다 조금 나아지고, 코로나 발생 전 57% 수준까지 상승할 전망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코로나19의 그림자에서 사실상 완전히 벗어난 올해, 유독 한국영화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8월까지 전체 극장 개봉작 중 한국영화 점유율은 38.5%로, 이는 코로나 기간인 2021년(30.1%)을 제외하면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2004년 이후 최악의 숫자다. 한국 영화계 관계자들이 위기를 체감하는 게 당연하다.

#신중해진 20대… 심리적 저항 커져

왜 이럴까. 30일 국내 최대 극장 사업자인 CJ CGV가 언론을 대상으로 가진 ‘23년 국내 영화시장 및 트렌드 리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CGV는 코로나19 이후인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까지 영화소비 경향을 분석했다. 조진호 CGV 국내사업 본부장은 “과거 20대가 먼저 극장에 나와 시장을 리딩한 것과 달리, 지금은 영화를 지켜본 후 관람하는 패턴을 보인다”고 밝혔다. CGV에 따르면, 2019년 개봉 평균 관람 시점은 10.8일에서 최근 1년간은 15.1로 4.3일 늦춰졌다. 특히 10대는 10.6일에서 16.9일로 6.3일 늘었고, 20대는 10.4일에서 15.1일로 4.7일 늘었다. 영화가 개봉하면 가장 먼저 극장으로 달려오던 10대와 20대가 이젠 시사회 반응과 리뷰 등을 확인하고 영화를 보는 신중한 소비자가 됐다. 영화관에서 만난 김진호(25·가명)씨는 “오펜하이머를 보러 왔다”면서 “한국영화는 올여름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는데, 평이 좋은 영화를 보는 편”이라고 말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영화, 특히 한국영화의 경우 돈을 내고 봐야 하는 이유를 소비자들에게 설득해야 하는데, 티켓 가격만 오르며 심리적 저항만 커졌다”고 진단했다.

#외화는 반등·특별관 인기… 극장은 회복세

어려운 와중에도 극장 수익은 완만한 회복세다. 외화 중심으로 관객이 일부 늘었고, 티켓 가격이 비싼 특별관이 인기를 끌면서 수익에 도움을 주고 있다. 아이맥스(IMAX), 4DX, 골드클래스 등 CGV의 특별관을 찾는 관객 비중은 2019년 13.4%에서 최근 1년간 21%로 크게 늘었다. 이런 추세에 발맞춰 CGV는 특별관을 확대할 계획으로, 이미 지난 7월25일 문을 연 신세계 경기점의 경우 6개 관이 모두 특별관으로 꾸며졌다. 극장은 무인 티켓 발매기(키오스크) 설치 등 비용 절감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이런 극장의 고급화를 바라보는 배급사 측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배급사 측은 관객이 감소하고 있는 데다 티켓 가격이 올랐음에도 객단가(관람객 1인당 티켓 매출)가 별로 오르지 않으면서, 극장과 나눠 갖는 수익이 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세계일보 분석결과 CGV 일반관의 평일 티켓 가격은 2018년 1만1000원에서 2022년까지 4년 새 1만4000원으로 3000원 오른 데 비해, 객단가(고객 1인당 티켓 매출)는 2019년 8443원에서 2023년에는 1만216원으로 4년간 1773원 오르는 데 그쳤다. 특히 올해 한국영화의 객단가는 9917원으로 1만원도 채 되질 않는다.
#한국영화 돌파구는… 다변화·상생·육성

20대의 극장 방문 패턴 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극장 영화의 최대 경쟁 상대인 OTT 작품보다 재미없는 작품으론 승부를 보기 어려워졌다. 유명배우·감독·대작이라는 흥행 공식도 통하지 않는다. 티켓 가격 인하가 임시방편이 될 수는 있지만, 극장 측의 우려처럼 고객이 급격히 늘거나 외화 쏠림 현상 해결을 위한 근본적 해법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티켓 가격 탄력제 등 가격 변화의 필요성은 제기된다. 김성수 평론가는 시간대별·기간별 요금 차등화를 제안했다. 공공영역의 지원도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민간의 투자가 위축되는 상황인 만큼) 정부 역할이 크다. 영화 산업 전반에 공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기관·협회들의 역할(제작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예산 축소 기조로 현재 공적 영역의 영화 지원 확대는 기대하기 힘들다. 한 업계 관계자는 향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작 영화 제작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영화가 살아남으려면 객단가 상향 등 극장이 상생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게 제작·배급 관계자들 목소리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한국 영화계가) 힘을 많이 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지난해 ‘올빼미’와 ‘육사오’가 좋은 사례다. 유명한 감독도 아니고 배우가 최고 수준도 아니고, 제작비를 많이 쓴 것도 아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젊은층의 호응도 얻었다”고 말했다. 이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라는 것”이라며 가볍고 다양한 영화로 시장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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