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학생들이 겪은 간토학살…“기록 없다” 발뺌 언제까지? [특파원 리포트]

박원기 2023. 9. 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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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아오야마학원 중등부 학생들이 간토대지진 참상을 보고 겪은 대로 기록한 진재기 (震災記) (아오야마학원자료센터 소장)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쿄, 그래도 작문 수업은 계속됐습니다. 1923년 10월 아오야마학원(青山学院) 임시 교실에서 학생들은 '9월 1일의 상황'에 대해 썼습니다. 9월 1일은 규모 7.9의 강진으로 1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낸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날이었고, 이날은 지진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였습니다.

중등부 1학년부터 5학년이 썼습니다. 지금 우리로 치면 중1에서 고2 정도의 나이였습니다. 당시 전교생의 80% 정도인 6백17명이 참여했습니다. 글 쓴 걸 모두 합치니 1천 200페이지 가까이 됐습니다. 책으로 묶으니 14권이 나왔습니다. 간토(関東) 대지진을 일본에서 '간토대진재(関東大震災)'로 부릅니다. 지진을 기록했다는 의미의 '진재기(震災記)'가 이렇게 쓰였습니다.

간토대지진 이후 임시 교사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아오야마학원 학생들 (아오야마학원자료센터 소장)


■유언비어 속 조선인 무차별 공격
간토대지진은 도쿄를 비롯해 일본 수도권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극심한 혼란 속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방화한다' 같은 어이없는 내용이었음에도 조선인들은 일본인 자경단 등으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았습니다. 진재기에서도 역시 그런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메구로(※도쿄에 있는 한 행정구역 지명) 방면에서 여자아이가 파랗게 질린 채 보자기를 메고 도망쳐 왔다. 듣고 보니 '조선인 3,000명이 메구로 화약고를 덮친다는 것이다. (중략) 모두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칼을 든 사람, 창을 든 사람, 막대기를 든 사람이 무리를 지어 경비하고 있다. 꼭 갑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옛날 무사 같았다. 조선인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조선인 소란으로 밤을 새웠다."
- <진재기 3-갑(甲)> 중에서-

"저녁에 조선인들이 방화하거나 우물에 독을 넣거나 한다고 전해 들어 지역민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자경단을 조직하고 모두 무장하여 각자 경계하고 있었으나 조선인은 잡히지 않았다."
- <진재기 2-정(丁)> 중에서-


"조선인에 대한 압박, 감금, 학살이 도처에서 행해졌다. 불쌍한 조선인들. 일본(관동)은 이 지진으로 옛 시절을 재현한 것이다. 그 야만의 시대를."
- <진재기 2-갑(甲)> 중에서-


"담 위로 머리를 내민 자가 있어서 모두가 "조선인이다"라면서 그 사람을 일본도와 몽둥이로 죽을 정도로 가해했다. 잔혹·무정했고 차마 거의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자를 경찰에 데려가 자세히 조사했더니 일본인이었다.
- <진재기 2-정(丁)> 중에서-

■ "인간 목숨 지키는 게 나의 일"

무간지옥 같던 그때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은 일본인들이 있었습니다. 오카와 쓰네키치(大川常吉·1877~1940)가 그랬습니다. 46살에 가나가와(神奈川)현 쓰루미(鶴見) 경찰서장이던 그는 자경단에 쫓기던 조선인들을 경찰서로 모이게 했습니다. 조선인 보호를 위해 경찰 수십 명을 배치했고, '조선인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의 겁박에 "인간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받아쳤습니다. 그렇게 구한 조선인이 300여 명이었습니다.

진재기를 펴낸 아오야마학원도 그랬습니다. 당시 '아오야마 학보'에 따르면, 학교 측은 지진이 일어난 다음 날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24명, 50명, 40명의 조선인을 학교 시설에 수용했습니다. '구제부'와 '야경단(야간 경계)'까지 조직해 혹시 있을지 모를 자경단의 무차별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지진 다음 날) 시부야 경찰서의 의뢰를 접하고 먼저 24명의 조선인을 수용하고 밤엔 야경(야간 경계)을 시작했다. 3일엔 조선인 50명을 수용, 4일엔 학원 구제부가 조직됐고 40명의 조선인을 수용했다"
-<아오야마 학보(青山学報) 1923년 12월 5일 발행>

김문길 / 한일문화연구소장
아오야마학원은 기독교계 학교로 (간토대지진 당시에도) 선교사들이 운영했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에서 비롯한 포교를 많이 했습니다. 당시 많은 조선인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니까,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을 데려다가 숨겨주기도 하고 여러모로 도움을 줬던 교육기관이었습니다.

■ 곳곳에서 '100주년' 추모, 그러나…
1일 오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00주년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에서 하토야마 유키오(사진 가운데) 전 일본 총리가 묵념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일본에선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을 맞아 곳곳에서 추도행사가 열렸습니다. 1일 오전 간토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는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도 일본 시민단체인 일조협회가 주관한 추도식이 진행됐습니다.

일본 주재 한국대사관도 도쿄 지요다구 국제포럼에서 '제100주년 관동대진재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을 열었습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를 비롯해 현재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 후쿠시마 미즈호 사회민주당 대표, 다케다 료타 일한의원연맹 간사장 등 여러 일본 정치인들이 참석해 조선인 희생자를 추도했습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추도식에 참석한 뒤 기자들에게 "일본은 조선인 학살을 제대로 조사하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간토 학살 100년을 맞아 크고 작은 추도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일본 정부와 도쿄도의 행태는 날이 갈수록 씁쓸함만 더해주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 대변인 격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간토 조선인 학살 관련 질문을 받고도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했고,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간토 대지진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올해까지, 7년 연속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00년 전 진재기를 썼던 일본의 10대 학생들이 이들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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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기 기자 (rememb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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