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탄 벼슬아치 만나면 피곤..'피마길'로 모인 백성[땅의 이름은]

전재욱 2023. 9. 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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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산업 혁명 이전까지 걸어 다녔다.

유일한 교통수단은 우마(소와 말)였는데 여염집의 평민은 넘볼 수가 없었다.

말은 암수를 가려서 길렀다.

그대로, 백성이 '말'을 '피'하려고 만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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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편>
한양 남쪽 말죽거리와 마방로, 북쪽의 역촌동과 역말로
지방 출장 관리에게 말과 숙식 제공하던 역에 터잡은 지명
마전교, 마천, 마장동, 자양동 모두 말과 연관해 붙은 이름
말탄 양반 만나면 엎드려야 해서 피하려고 낸 길이 피마길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인류는 산업 혁명 이전까지 걸어 다녔다. 유일한 교통수단은 우마(소와 말)였는데 여염집의 평민은 넘볼 수가 없었다. 나랏일을 하는 관리나 부를 쌓은 만석꾼과 상인 정도의 특정 소수만이 말 등에 올랐다. 서울 지명에 유독 말(馬)이 붙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명은 절대자의 입장에서 명명되기에, 말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마패(사진=문화재청)
한양 도성을 중심으로 지방의 길목에는 어김없이 역과 마방(마구간)이 들어섰다. 지금의 서울 서초구의 말(마)죽거리는 양재역(驛) 덕에 생겨났다. 역은 한양에서 지방으로 가는 관리가 말을 얻고 숙식을 해결하던 곳이었다. 양재역 부근에서 말에게 죽을 쒀서 먹이던 게 지금의 말죽거리로 이어졌다. 서초구에 있는 길 마방로도 일대에 마방(馬房)이 있어서 이름 붙었다.

은평구 역촌동(驛村洞)은 옛 지명 역말(驛말)에서 비롯했다. 마찬가지로 한양 북쪽으로 드나드는 길목에 역이 있던 곳이다. 현재 역촌동에서 대조동을 잇는 역말로가 나 있다.

성동구 마장동은 조선 시대 말을 기르는(양마장) 터였다. 이 동네 이름이 마장리(馬場里)였던 게 지금까지 이어진다. 말은 암수를 가려서 길렀다. 수말은 마장동에서 키웠고, 암말은 마장동에 인접한 광진구 자양동에서 키웠다. 자양동의 옛 지명은 자마장리다. 자마(雌馬)는 암말을 가리킨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네 이름이 지금처럼 바뀌었다.

말을 사고팔던 시장이 종로구 청계천에 일대에 있었다. 지금의 종로5가와 방산동을 잇는 다리 마전교(馬前橋·馬廛橋)는 말을 사고파는 시장(마전·馬廛)이 있던 터가 있어서 이름 붙었다.

자양동에 있는 뚝섬은 한양에서 제일가는 너른 목초지였다. 말을 기르기에 천혜의 자연환경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일대는 조선 임금이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기는 장소였다. 여기에는 임금이 행차하면 오르던 성덕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지금은 헐려서 성덕정길로 남았다. 터에는 성수동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송파구 마천동은 조선후기 장군 임경업이 인근의 마산(馬山)을 지나다가 말에 물을 먹였는데, 이후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천(馬川)이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양쪽 빨간 선이 피마길이고 가운데 큰길이 종로다.(사진=서울기록원)
임금이든 장군이든 말을 타고 나타나면 마주하는 백성은 피곤하기가 그지없었다. 조선 시대 경복궁에서 난 육조거리(지금의 종로구 세종대로)에서는 길바닥에 엎드린 백성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거리 양옆으로 육조 관청이 들어서 있었고, 말을 탄 고관대작이 수시로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예법은 백성이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이런 피곤한 상황에 지친 민심을 달래고자 육조거리(종로) 뒤로 피마(避馬)길을 냈다. 그대로, 백성이 ‘말’을 ‘피’하려고 만든 길이다. 사실 대로에서는 빠르게 달리는 말에 치여 백성이 다치는 일도 잦았다. 예나 지금이나 차마가 사람을 피해야 하거늘, 현실은 사람이 차마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전재욱 (imfew@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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