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때문이었을까요, 분노가 치밀어서였을까요. 남학생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습니다. 미술 수업에서 한 교수로부터 성기 노출을 강요받은 직후였습니다. 앞에는 여학생들로 가득했지요.
누드화 수업의 모델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굴욕적인 날은 처음이었지요. 모델로 설 때면 그는 항상 가리개로 중요 부위를 가리곤 했습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후반 미국. 청교도적 엄숙주의가 지배적인 때입니다. 남성이 여학생들 앞에서 성기를 노출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델 앞에 선 교수의 표정은 단호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모델에게 다가가 가리개를 내려버렸지요.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 역시 경악했습니다. 술렁이는 학생들에게 교수가 외칩니다. “여성도 화가로서 모델의 몸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직업적 특권을 가져야 합니다.”
큰 추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의 고발이 이어졌고, 학교 당국이 조사에 나섰지요. 그 교수가 여학생을 개인 교습실로 불러 옷을 벗고 자기 몸을 보여줬다거나, 어린아이의 누드사진을 찍었다는 제보가 이어집니다. 결국 학교는 그를 해고했지요. ‘노출증 환자’, ‘변태’라는 낙인도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내 반전이 일어납니다. 많은 학생이 그의 ‘복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교수가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들도 학교를 떠나겠다는 외침이었지요. 어떤 이들에게는 “변태”였고, 또 다른 학생들에겐 “위대한 예술가”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저주와 상찬을 동시에 받은 이 문제적 화가의 이름은 토머스 에이킨스(1844~1916년). 미국 사실주의의 아버지로 통하는 인물이지요. 그는 어쩌다 ‘누드’에 천착해 시대와 불화하게 됐을까요.
필라델피아에서 과학과 미술을 사랑한 소년 에이킨스
날 때부터 누드에 집착한 건 아니었습니다. 가정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에이킨스는 1844년 필라델피아의 서양식 서예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과 헌법이 쓰인 곳이 필라델피아였지요. 미국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높은 수준의 근대 교육이 이뤄지던 곳이었습니다. 제법 부유한 집안 환경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요.
그의 모교 센트럴 고등학교는 응용미술 분야의 전문가를 육성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에이킨스는 그림에서도, 공부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그는 과학에 흥미를 보였지요.
감성적인 예술과 이성적인 과학은 대척점에 서 있을 것 같지만 에이킨스는 둘을 조화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합니다. 물에 떠 있는 배를 그릴 때면 배가 바람의 방향과 풍속에 따라 만들어지는 기울기를 수학적으로 계산하곤 했었지요.
과학을 예술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친구 사무엘 머레이는 증언합니다.
“에이킨스는 회화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삼각법이나 대수학으로 풀었습니다”
1866년은 에이킨스의 미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기억됩니다. 프랑스 예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하게 되면서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거장 장 레옹 제롬의 지도를 받았지요. 인체를 해부하고 재구성한 누드화에 심취하게 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그는 미국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성의 나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 남성의 나체를 제외하고.”
하지만 거장의 교육이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제롬의 회화에는 대상을 미화하는 아카데미즘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에이킨스에게 있어 신화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회화였습니다 .
에이킨스는 여기에 반감을 느끼며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린다”는 리얼리즘의 정신을 체화합니다. 동시대를 사는 도시인, 노동자 등을 그리는 법을 배워나갔지요.
상류사회의 허세를 담은 그림을 그는 누구보다 혐오했습니다.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서 나온 정확한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 그의 지상과제였습니다. 미국에서의 합리적이고 실질주의적인 고등교육이 에이킨스의 미술관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술학도가 해부학 수업을 들은 이유
“제가 해부학 수업을 청강해도 되겠습니까?”
1869년 그가 미국으로 귀환합니다.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과 인물을 그리면서 아메리칸 리얼리즘을 실천했지요.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이 있었습니다. 제퍼슨 의과대학과 펜실베니아 의과대학. 해부학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인체의 구조를 보다 면밀히 이해하고 이를 그림에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에이킨스는 말합니다. “인간의 몸을 그리고자 한다면 뼈와 근육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이 필수적”이라고요.
미국 미술계에서 에이킨스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습니다. 과학적 분석으로 구현한 그의 회화는 보기만 해도 넋을 잃게 되지요. 100년이 지난 현대인의 눈으로도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미술학교의 교장이 된 에이킨스
“우리 미술학교의 원장을 맡아주시오”
1882년이었습니다. 에이킨스에게 제안이 들어옵니다.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이었지요. 이미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차였습니다. 자신이 직접 미술학교의 커리큘럼을 짤 수 있는 교장이 될 기회. 그는 기꺼이 수락합니다.
취임 후 그는 학교를 탈바꿈 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합니다. 단순히 미술만 가르치는 것을 넘어, 해부학까지 커리큘럼에 추가했지요. 실제로 칼을 들고 시신을 절개하는 해부술(dissection)도 포함됐습니다. 미국에선 전례가 없던 일이었지요. 지역 언론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진보한 교육과정”이라는 극찬을 보냅니다.
언제나 모난 돌은 정 맞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예술가라면 더욱 그렇지요. 에이킨스가 주도한 누드화 수업에서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에이킨스는 유럽에서 돌아온 후 누드가 미와 진리를 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학생들 역시 인간의 신체를 가까이서 제대로 봐야하다고 생각했지요.
예술과 외설사이를 줄타기 한 에이킨스
“남학생, 여학생 구분 없이 모델이라면 모두 자유롭게 자신의 나체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에이킨스는 남녀 학생들 구분 없이 서로에게 모델이 되어 주라고 권유했습니다. 기존 누드화 수업에서 모델의 중요 부위는 언제나 가려져 있었습니다. 에이킨스는 이마저도 벗어던지라고 권고했지요. 때에 따라선 교장인 자신이 스스로 누드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성기 노출도 전혀 개의치 않았지요. 골반의 움직임에 관해 묻는 여학생 아멜리아 반 뷰런을 작업실로 불러 직접 옷을 벗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소문이 나면서 파장이 일기도 했었지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파격이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도덕관념을 공유하던 나라였습니다. 19세기 말에서 더욱 그랬지요. 일부 학생들의 고발이 이어졌고 학교 당국의 조사가 들어갑니다.
학교 측에서는 에이킨스를 계속 품고 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후원하는 지역 사회의 눈치도 봐야했지요. 1886년, 그는 결국 파면을 당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반문하면서 학교를 떠났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인 벌거벗은 모습을 보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남자 조각상만, 여자는 여자 조각상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까. 이건 예술가에 대한 모욕입니다.”
미술학도들 ‘변태’ 에이킨스 구하기에 나서다
학생들이 ‘에이킨스 구하기’에 나섰습니다. 당국의 결정에 전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지요. 절반 이상의 학생이 이에 동참했습니다. 파면 결정이 번복되지 않자 ‘필라델피아 미술 학생 연맹’(Art Students‘ League of Philadelphia)을 결성합니다.
기존 사회의 도덕관념에 저항한 그를 학생들은 예술가로서 존경했던 것이었습니다. 여성 화가 지망생들 역시 자신들을 한명의 예술가로서 존중해준 에이킨스를 좋아했지요. 남성 모델에게 성기 노출까지도 요구했던 건 그가 여성 화가 지망생들에게도 나체를 직접 보고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예술가는 성별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지요.
연맹의 학생을 모아두고 에이킨스는 자신의 강의를 시작했지요. 물론 주제는 ’누드‘였습니다. 이 때 만났던 수 많은 제자들이 아메리칸 리얼리즘의 주춧돌로 활약합니다.
카메라의 예술가 에이킨스
강의가 시작된 이후 에이킨스의 리얼리즘은 더욱 정교해집니다. 카메라의 등장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유럽에서 카메라 발명 후 그대로 재현만 하는 회화에 대한 회의가 일었었지요. 유럽의 화가들은 ’인상주의‘라는 화풍으로 카메라로 구현 불가능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에이킨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사진이라는 근대 기술 문명의 상징을 도구삼아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화려하게 꽃피워 나갔지요. 과학과 예술을 접목하는 건 그의 탁월한 재능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사진을 본떠 그려졌지요. 에이킨스의 그림을 포토리얼리즘(사진을 그대로 회화로 구현한 작품)의 원조라고 부르는 배경입니다.
사실 그대로 보면서 금기에 도전한 에이킨스
1916년 6월 25일, 에이킨스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족은 부인인 수잔 한나가 전부였습니다. 불혹의 나이에 결혼해 아이도 낳지 않았지요.(에이킨스가 동성애 성향을 가졌다는 예술사학자들의 주장도 있습니다.) 예술가로서 세상의 금기에 도전했지만, 개인으로서는 방종한 삶을 살진 않았습니다.
사실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은 사후에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후계자들이 같은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칸 리얼리즘이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하나인 에드워드 호퍼 역시 리얼리즘 화가로 손꼽힙니다.
미술사학자 로이드 굿리치(1897~1987년)는 에이킨스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그는 현대 미국의 도시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현실 속에서 강력하고 심오한 예술을 창조한 최초의 주요화가다.”
에이킨스가 그린 작품을 다시 돌아봅니다.과장 없이 현실을 담으려는 결기가 읽힙니다. 과장과 허세가 난무하는 오늘 날, 어쩐지 그의 정직한 시선이 그립습니다.
<네줄요약>
ㅇ토머스 에이킨스는 과학과 예술을 접목한 예술가였다.
ㅇ카메라의 발명 이후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가 생겨난 것과 달리, 에이킨스는 더욱 사진같은 그림을 구현하고자 애썼다.
ㅇ인간의 누드에 천착한 그림을 그리다가 미국 사회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ㅇ오늘 날 아메리칸 리얼리즘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참고문헌>
ㅇ신채기, 토머스 에이킨스: 해부학·리얼리즘· 그리고 일그러진 근대의 초상, 미술사학보 37집, 2011년
ㅇ심진호, 월트 휘트먼과 토머스 에이킨스의 사진적 사실주의, 비교문학 60집,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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