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철 지난 바다가 그리웠다[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2023. 9. 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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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서우봉 아래 함덕해변이 석양에 물들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내 귀는 소라껍질/파도 소리를 그리워한다

(Qui aime le bruit de la mer/Mon Oreille est un coquillage).

영화 ‘인셉션’(2010년작·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서 흘러나오던 그 유명한 곡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부른 프랑스의 전설적인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1915.12.19~1963.10.11)가 사망하자 그 충격(심장마비)으로 숨을 거뒀다는 프랑스 시인 장 콕토(1889.7.5~1963.10.11). 그의 짧은 시 ‘귀’처럼 몸이 먼저 파도소리를 기억하는 듯 반응하기 시작했다.

함덕 바다는 우윳빛이 감도는 블루다. 한여름, 산(오름)을 오르기 위해 함덕으로 간 건 아니다. 바다를 보기 위해 산으로 갔다. 바다를 만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작열하는 태양이 숨막히는 여름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함덕 바다의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서우봉으로 향한다. 어떤 모습인지 보기 위해. 서우봉에 오르는 언덕에서 자꾸만 함덕 바다로 시선이 옮겨가고 또 옮겨간다. 마치 서우봉을 오르기 전에 바닷가에서 만난 ‘팬덤4’ 드론이 된 듯, 함덕의 해변을 하늘에서 훑어보고 싶은 듯, 서우봉으로 서둘러 향했다.

지독한 폭염. 마치 이날 해변의 공기는 무라카미 류의 청춘의 묵시록 같은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표현처럼 ‘햄버거에 올라 탄 치즈처럼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태양은 항상 떠나가는 여름을 보내기 싫은 듯, 더 뜨겁게 타오르는 듯 하다.

#함덕 바다는 우윳빛 감도는 블루다… 바다가 그리워 산에 오른다

산호빛 바다 동쪽 함덕 해변에서 바라본 서우봉 일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13>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서우봉

서우봉은 함덕해수욕장 오른 편에 자리잡은 키 작은 오름이다. 함덕리와 북촌리 경계에 위치한 서우봉의 표고는 111m, 비고 106m, 둘레 3493m로 북쪽과 남쪽 2개 봉우리가 솟아있는 원추형 화산체이다. 올레길 간세 안내판에는 서우봉을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 올라오는 듯한 형상’이라고 하여 예부터 덕산으로 여겨져 왔단다. 동쪽 기슭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21개의 굴이 남아 있단다. 함덕리 고두철 이장과 동네 청년들인 함덕 서우봉 지킴이들이 2003년부터 2년동안 낫과 호미만으로 만든 서우봉 산책로를 오른다.

서우봉 초입에서 만난 풀이 무성하게 자라 방치된 함덕리 와요지를 볼 때도 이미 마음은 바다로 향했다. 속칭 ‘와막밧’이라 불리는 곳이 바로 함덕리 와요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 와요는 서우봉의 서쪽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점에 위치한다. ‘웨’ 혹은 ‘와’는 기와(瓦)의 뜻이다. 전체 길이 1100㎝, 너비 280㎝, 높이 166㎝이다. 현무암과 진흙을 빚어서 가마를 축조했단다.

함덕 해변 오른편에 자리잡은 표고 111m로 낮은 오름 서우봉으로 오르는 초입과 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과 숲길 그리고 코발트빛 함덕 해변(왼쪽부터). 제주 강동삼 기자

바다를 바라보며 풀을 뜯는 말들도 만난다. 전망 좋은 곳에서 가장 호사스런 만찬을 즐기는 모습이다. 목가적인 풍광을 지나면 숲길이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망오름 정상으로 가는 길과 서모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용암 바위가 정상에 노출된 남쪽 봉우리 남서모보다, 송이로 된 분석구인 북쪽 봉우리 서산봉수가 있는 망오름을 향해 걷는 코스를 택하는 게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모 정상에선 함덕바다를 만날 순 없다.

망오름에 오르면 서우일출을 볼 수 있는 동쪽 전망대가 나온다. 다려도와 북촌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묘산봉까지 보인다. 섬의 모습이 물개를 닮았다고 해서 ‘달서도’라고도 불리는 다려도는 예전 4·3 취재차 북촌리마을 4·3길을 답사하던 중 만난 적이 있다. 원앙의 집단 도래지로 유명한 곳으로 수천마리의 원앙이 찾아든단다. 너븐숭이 4·3기념관과 애기무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문학비로 만날 수 있는 비극이 서린 곳이기도 한 북촌리가 ‘아득히 먼곳에’ 있는 듯 펼쳐졌다. 서우봉은 낮았지만, 먼 풍경까지 보였다.

# 북촌리·다려도 아득히 먼 곳에… 일몰과 일출을 다 보는 서우봉은 낮지만, 먼 풍경도 잡는다

망오름 정상 서우일출을 볼 수 있는 동쪽 전망대에선 4·3의 아픔이 서린 북촌리 마을과 다려도가 멀리 저만치서 보인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서우봉 서쪽 낙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함덕 해수욕장과 함덕 시내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서우봉 쪽에서 바라본 석양이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서우봉은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수대를 지나 서쪽 낙조 전망대에선 함덕의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에메랄드빛 바다 수평선 위로 연출하는 붉은 노을은 영주 10경 중 하나인 사봉 낙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단다. 여유 있을 때 이 일몰을 보기 위해 한번 더 찾아와야 할 듯 싶을 정도로 안내판 ‘서우낙조’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영화 ‘니키타’(1990년작·뤽 베송 감독)가 돋보기같은 카메라가 장착된 뿔테안경을 끼고 촬영하는 사람처럼.

태양을 가려주는 숲길을 내려오지만, 바람이 숲을 배회하지 않아 덥다. 숲길에서도 바다가 그립다. ‘피로에 지친 자는 태양을 저주한다지. 그들에게 숲은 단지 그늘일 뿐이라지. 바다에 풍덩 빠져들고 싶을 뿐이었다.

서우봉을 내려오자 마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다가가 미친 듯 신발을 벗었다. 모든 것을 해변으로 밀어버리는 파도, 하얀 포말이 우유처럼 부드러웠고, 발바닥에 닿는 모래알은 양탄자처럼 폭신하고 부드럽다. 바다에 몸을 담가 한참을 걸어도 모래가 멀리 멀리 펼쳐지는 곳, 옥빛바다가 한없이 투명하고 한없이 부드럽게 감싸주는 곳.

# 서우봉 바로 밑 함덕 해변, 폴 세잔 작품처럼, 블루라군처럼, 은밀한 해변처럼…

함덕해수욕장의 동쪽 모래해변은 너무나 투명해 바닷속 모래알까지 선명하게 내다보인다. 밀물일 땐 한없이 걸어가야 발을 담가볼 수 있을 정도다. 제주 강동삼 기자

사실 함덕해수욕장의 해변 형태는 제주의 여느 해변과 달리 모래사장을 크게 세군데로 나눌 수 있다. 함덕해수욕장 앞 베이커리 카페 ‘델문도’ 왼쪽 바다에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해수욕하다 지치면 보말과 조개를 잡고 있다. 반면 오른쪽 바다, 사실상 해수욕장의 중앙 해변에선 파라솔을 빌려 하루종일 구릿빛으로 몸을 태우고 아이들은 튜브에 몸을 싣고 있다.

그러나 함덕해수욕장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서우봉에 오르기 전, 혹은 내려오면 만나는, 부끄러운 듯 숨은 바다였다. 서우봉이 바다 동쪽을 막아줘 아늑해서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해수욕하는 사람들은 과감하게 웃통을 벗어 젖히고 있다. 여인들도 모처럼 비키니를 입고 있다. 1883년쯤 사과 한개로 파리를 놀라게 하고 싶다던 화가 폴 세잔(1839. 1.19~1906.10.22)의 화풍에서 만나는 ‘목욕하다 쉬는 사람들’보다 더 아름답다.

놀라운 장면도 펼쳐졌다. ‘블루라군’같은 빛깔의 바다에서 바닷게 두 마리가 내 곁으로 스멀스멀 파도에 밀려온다. 게걸음은 느린 걸음으로 알고 있었지만, 바다 위를 헤엄치는 게걸음은 빨랐다. 파도에 넘실거리며 바닷게가 자꾸 내게로 다가온다. 도망치듯, 해변가로 뒤돌아 헤엄친다. 물리면 금방이라도 세균에 감염되기라도 할 것 처럼. 그러나 고작 할 수 있는 수영은 바닷게보다 못한 개헤엄이어서 당혹스러울 만큼 당황했다. 하마터면 게들에게 당할 뻔한 고비를 넘겼다.

#연인들 발자국 대신 산책 나온 강아지 발자국 새겨진, 철 지난 바닷가

9월 첫날 노을이 지도록 여름이 떠나가는 것이 아쉬운 듯, 철 지난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시에서 서쪽 바다하면 협재를 떠올리듯, 동쪽 바다하면 떠올리는 바다가 바로 함덕 해변이다. 여름이면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에메랄드빛 바다에 몸 한번 담가야 여름과 작별할 수 있다. 9월 첫날 레저힐링축제가 있어 다시 찾아간 함덕해변은 어느새 ‘철 지난’ 바닷가가 되고 있었다. 이미 해변 울타리에는 폐장을 안내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해변을 거닐고 있다. 왁자지껄한 소음들과 파라솔, 젊은 연인들이 벗어놓은 샌들과 연인들의 발자국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강아지와 산책 나온 인근 주민들의 발자국이 대신 모래사장을 도장 찍듯 새기며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철 지난 바닷가를 피서철 때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이 만난다. 해수욕하러 온 사람이 아니더라도 뜻하지 않게, 그 산호빛 바다의 유혹에 못 이겨 발이라고 담근다. 그러나 이내 높은 파도를 만나 반바지가 젖는 순간엔 포기하는 심정으로 결국 몸을 바닷물에 적신다. 그리고 첨벙 바닷물에 몸을 맡긴다. 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띄운다. 바다도 하늘도 한없이 투명한 블루다. 힐링이란 이런 느낌임을 깨닫는다.

철 지난 바닷가에선 ‘정신줄 놓을 정도’로 달려드는 바다가 아니어서 좋다. 한적해서 좋다. 파도소리가 이미 스산하게 들릴 정도다. 바닷물 역시 미지근하지 않고 조금은 쿨~하게 시원해서 더 좋다.

# 꿈결같이 짧은 여름 휴가 아쉽지만… 현실로 돌아가 다시 0에서부터 시작하라

1일부터 3일까지 열리는 2023 제주레저힐링축제’를 위해 해변에 제작해놓은 모래조각 작품이 관광객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1일 함덕해수욕장에서 야자수와 노을을 무대 삼아 2023 제주레저힐링축제가 개막돼 사람들이 콘서트에 열광하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그래서일까. 철 지나는 무렵, 이런 늦은 여름 휴가를 지내는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주기라도 축제가 열리고 있다. 9월의 첫날, 1일부터 3일간 이곳 철 지난 바닷가에서 열리는 ‘2023 제주레저힐링축제’가 그것. 이미 해변엔 모래조각 작품(모래조각가 최지훈· 중국작가 장저우 작품)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폭죽이 시작을 알리고 K팝이 흘러 나온다. 모로코 해변을 연상시키는 야자수 뒤편으로 그림처럼 펼쳐지는 석양이 무대로 변했다. 폴 세잔의 붓 터치도 흉내낼 수 없는, 오렌지빛 하늘을 무대 삼아 사람들은 음악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축제마저 일도 관심없는 연인들, 철 없는 연인들은 철 지난 바닷가에 빠져 있다. 서우봉 아래 해변 바닷물에 몸을 맡긴 채 한없이 포옹하고 있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며칠 전 기자실에서 갑자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인셉션’ 마지막 장면이 현실이냐, 꿈이냐를 놓고 얘기가 뜬금없이 나왔다. 아마도 최근 놀란 감독의 새 영화 ‘오펜하이머’ 때문에 시작된 듯 싶다. 한 기자는 마지막 장면이 현실임을 비로소 알게 됐다고 확신했다. 우린 그놈의 난해한 영화 ‘인셉션’의 결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날도 확신이 안 선 듯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아이들을 만나는 장면이 현실이 되는 해피엔딩일까. ‘메타포(암시)’ 금속 팽이가 회전하다 쓰러지면 현실이고, 계속 돌아가면 꿈일까. 아니면 마이클 케인이 나오는 장면은 현실이라고 말한 놀란 감독의 말이 진실일까. 나도 놀란 감독처럼 ‘모든 게 의심되는 나이’가 된 지 오래됐다.

놀란 감독은 2015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이런 연설을 했단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길, ‘노인은 모든 것을 믿고, 중년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The old believed everything. The middle-aged suspect everything, The young know everything)’고. 중년인 그는 말했다죠. “꿈을 좇지 말고 현실을 따라가길 원한다”고.

여름 휴가는 언제나 금세 시간이 사라져 버려 항상 짧게 느껴진다. 특히 늦은 여름 휴가는 더 짧게 느껴진다. 일주일을 쓰든, 열흘을 쓰든, 늘 여름휴가는 짧다. 꿈결같은 여름휴가여서 아쉽지만, 현실로 돌아가련다. ‘인셉션’처럼, ‘Non, Je Ne Regrette Rien’ 피아프의 노래처럼….

‘저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모두 털어내고, 다 잊었어요… 다시 시작할거예요. 0에서 부터요.’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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