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홍범도 논란의 핵심, 역사의 소급 적용"

이경원 기자 2023. 9. 2.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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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홍범도, 독립군 몰살 관여 의혹" 따져 보니…


이번 주는 육군사관학교 내부에 설치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놓고 정치권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국방부는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해 기념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할 때 적절하지 않다"고 입장문을 냈습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관련 행적의 구체적 사례를 열거했습니다.


그렇다면, 국방부 주장에 대한 역사학계 주류 의견은 어떨까요.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SBS 팩트체크 사실은팀이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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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그리고 홍범도 장군

위 국방부 주장을 보시면, 홍범도 장군과 관련해 가장 많은 의혹이 제기된 역사적 사건이 1921년 자유시 참변입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현재 스바보드니)에서 독립군과 레닌의 적군(赤軍)이 교전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기술된 정의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독립군이 레닌이 이끌고 있었던 공산주의 세력, 이른바 볼셰비키 적군과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독립군이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희생됐다는 것, 그런데 홍범도 장군이 바로 이 볼셰비키 적군 편에 서서 독립군 몰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국방부가 제기한 겁니다.


일단 사실은팀은 자유시 참변이 어떤 사건인지 확인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러시아 적군과 독립군의 교전'이라고 일원적으로 규정할 만큼 단순한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령 안에서 벌어진 러시아 적군과 백군의 갈등, 그 사이 연해주를 불법 침법한 일본군, 결정적으로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로 나뉜 독립군 내 계파 갈등이 얽히고설킨 결과였습니다. 

먼저, 자유시 참변의 내용을 최대한 쉽게 정리해봤습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해석을 위해,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설명을 요약했습니다.
 
<자유시 참변 정리>
① 1921년, 연해주 지역의 일본군 탄압이 거세지면서, 점 조직처럼 움직였던 우리 독립군도 힘을 합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임시 정부 역할을 했던 '대한국민의회'는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지도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도 자유시에 주둔하게 된다.
② 하지만, 독립군 내부에 계파 갈등이 생긴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갈등이 대표적이었다. 고려혁명군정회의(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의 한인 정부를 자처했던 대한국민의회, 사할린의용대(상해파)는 상해 임시정부의 연장선에 있었다. 양군의 팽팽한 대치 상황 속, 형세는 고려군정의회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③ 이르쿠츠파의 뒤에는 볼셰비키 적군이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일본은 적군에게 독립군 해체를 요구했다. 일본군을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적군은 일본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독립군을 볼셰비키에 흡수하는 식으로 마찰을 피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④ 독립군 내의 계파 갈등, 여기에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이 맞물리면서, 6월 27일 밤 고려군정의회 지도부는 사할린의용대(상해파)의 강제 무장 해제를 결정하고, 다음날 공격을 시작한다. 희생자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최소 36명, 최대 5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즉, 자유시 참변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 독립군을 무장 해제한 동족상잔의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핵심은 홍범도 장군이 여기에 얼마나 개입됐는가 입니다. 이를 위해 1920년대 독립운동사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명예교수,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장세윤 수석연구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오세호 전 연구원입니다.


먼저, 홍범도 장군이 볼셰비키 적군의 지원을 받은 고려혁명군정회의(이르쿠츠크파) 편에 선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오세호 연구원은 "당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이 왜 고려혁명군정회의를 택했는지 당시 기록이 성명서 형태로 남아 있는데, 무장 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컸다"고 말했습니다.

정세윤 연구원은 당시 시대 상황에 빗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국방부 설명대로,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몰살에 개입한 정황이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에 가깝다는 겁니다. 정세윤 연구원은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본 군대는 허재욱 장군이 주도하는 의군부 독립군인데, 허재욱 장군은 홍범도 부대와 크게 활약한 부대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우리 독립군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들었던 홍범도 장군은 장교들과 솔 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오세호 연구원은 이르쿠츠크파가 아닌, 여기에 맞선 상해파 피해자들의 발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반병률 교수는 다른 증거를 들었습니다. 반 교수는 "오히려 참변 6개월 후 전모를 파악한 홍 장군은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탄원서를 소련 정부, 러시아 공산당, 국제공산연맹 측에 제출한 사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국방부 설명처럼 홍범도 장군이 상해파를 처벌하는 재판에 참여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부분이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관여하지 않은 또 다른 증거일 수 있다고 합니다.

오세호 연구원은 "당시 홍범도 장군은 한인들 사이에서 명망과 권위가 있었고, 이르츠쿠츠파는 이런 홍범도를 선임해 재판이 불편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반병률 교수는, 비슷한 맥락에서 적군 공산당에 이용 당했다는 점에 무게를 둡니다. 반 교수는 "당시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 관여하지 않았던 까닭에) 정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르쿠츠크파를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공산당 극동비서부장 슈미야츠키는 이런 홍범도가 재판에 들어가길 바랐고, 당시 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홍범도가 수락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홍범도 장군이 당시 자유시 참변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몰랐다는 것, 달리 말하면, 참변에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자유시에 모여있던 수천 명의 한인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소비에트 적군 제5군 직속 한인 여단으로 개편됐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여기서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습니다. 반 교수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자유시 참변 등 부침을 겪었던 독립운동 세력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통신과 연락을 재개하면서 통합 작업에 들어갔고, 1920년대 중반 만주 독립운동의 새 지평을 열어갔습니다.


국방부 말대로, 홍범도 장군이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대표대회에 참석한 것은 사실이고, 당시 레닌에게서 권총과 상금 100루블을 받았습니다. 다만, 1922년 당시엔 레닌 러시아 혁명 정부가 세계 약소 민족들에 굉장히 많은 지원을 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작성한 조사표가 발굴됐는데, 소속 정당도, 소속 노동조합도 '없다'고 적었고, 꿈은 '고려 독립'이라고 썼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2년 고려군 혁명군에서 제대하고, 1923년에 제대 군인들과 함께 연해주 이만에서 협동농장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나이로 60세인 1927년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1937년 9월, 소련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공화국 사나리크로 이주했으며, 이듬해에는 카자흐스탄의 소도시 크즐오르다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주류 역사학계의 주장입니다. 
 

소급 적용된 역사

이 밖에도 국방부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껏 많이 보도됐지만, 1920년대의 빨치산은 우리가 아는 빨치산과 개념 자체가 달랐습니다. 오세호 전 연구원은 "빨치산은 프랑스어로 '동지' 또는 '당파'라는 뜻의 'parti'에서 유래된 말로 비정규군을 의미한다. 홍범도를 비롯한 1920년 독립전쟁에 참전한 독립군들은 정규군이 아닌 '의용병'이나 '빨치산'으로 참가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팀이 취재했던 전문가들이 한 입 모아 강조한 부분이 있습니다. 국방부 주장의 '각론' 하나하나에 대한 팩트체크 보다는, 그 각론을 관통하는 국방부의 문제 의식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국방부의 각론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공간의 공산주의, 그리고 1945년 이후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공간의 공산주의를 동일하게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사실 두 기간의 공산주의는 문양이 매우 다릅니다. 지난 29일 국방부 브리핑에서 SBS 김태훈 기자가 말했던 것처럼, 김일성은 1912년생입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국방부 주장들은 김일성이 10대였을 시기였습니다. 반병률 교수는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독일 등에 맞서 한 편에 서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체제 경쟁이 시작된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고 부연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역사를 소급 적용하는 오류에 가깝다는 겁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장악했기 때문에 독재자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1950년대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2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끼워다 맞추다 보니 무리한 주장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실제,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행적은 1970~80년대 꽤 많이 알려졌음에도 국사 교과서에 매번 등장했습니다. 사실은팀이 7차 교육 과정까지 초·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전수 분석했는데, 1차를 제외한 2차 교육 과정부터 7차 교육 과정까지 홍범도 장군의 업적이 모두 실려 있었습니다. 특히, 국정 국사 교과서 시절은 공산주의 행적이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엄격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행적은 달리 바라봐야 한다는 역사학계의 공감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해석이 성역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새로운 사료가 나오면 해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다만, 협의되고 합의된 역사적 해석을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증거, 그러니까 새롭게 발굴된 사료가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으나, 경계 없이 활약했던 장군의 의지와 기개는 한민족 모두에게 큰 울림을 준다. 외세의 압제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한민족의 독립 전쟁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가 어느 곳에 있더라도 후세에게 귀감이 된다."

이건 SBS 사실은팀의 해석이 아니라, 국방부가 3년 전 펴낸 <독립전쟁과 홍범도>에 나온 문장입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현재까지 발굴된 홍범도 장군의 사료는,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당시 홍범도 장군의 영상 정도가 있습니다. 

(작가 : 김효진, 인턴 : 박진호)

이경원 기자 leekw@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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