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치안 지키자고 만든 '안전부스'…어쩌다 '골칫덩이' 전락했나

노경민 기자 박상아 기자 2023. 9. 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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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해돋이마을대피소 버튼도 작동 안되고 CCTV도 먹통
"사람 없는데 사이렌 울리기도"…관리 주체는 서로 떠넘기기
지난 8월31일 부산 영도구 해돋이마을 안전부스 출입문을 한 80대 어르신이 직접 닫고 있다. 2023.8.31/뉴스1 박상아 기자

(부산=뉴스1) 노경민 박상아 기자 = "안전 지킴이는 무슨. 저건 흉물이에요, 흉물."

184세대의 주민 265명이 살고 있는 부산 영도구 해돋이마을. 이곳에 20년째 거주 중인 박모 할머니는 안전지킴이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비단 박 할머니의 불만이 아니었다. 마을 치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주택가 골목에 설치된 안전부스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면서 주민들의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있었다.

지자체나 경찰 등이 서로 시설 유지·보수에 대한 책임까지 떠넘기고 있어 단순히 방치를 넘어서 버려진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지난달 31일 해돋이마을 구석에는 '안전지킴이존'이라고 적힌 부스가 놓여 있었다. 약 2.3m의 높이에 가로 1.7m 길이의 부스는 원래 열려 있어야 정상이지만, 굳게 닫혀 있었고 평상이 놓여 있어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안전부스 사용법은 이렇다. 만약 누군가가 쫓기고 있을 때 피해자가 부스 안에 들어가서 빨간색 버튼을 누르면 안에서 문이 잠긴다. 부스 안에서 해제 버튼을 따로 눌러야 열리고 밖에선 열 수 없는 구조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이렌이 울리고 112 긴급경보를 통해 경찰에 신고가 가는 방식이다.

부산 영도구 해돋이마을 안전부스 유리벽에 설치된 사용 안내서가 훼손돼 있다.2023.9.1/뉴스1 ⓒ News1 노경민 기자

그러나 취재진이 확인해 보니 문은 닫힌 상태로 방치돼 있었고,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열 수 있었다. 취재진 옆에 있던 80대 노인이 조금만 당겨도 문이 열릴 정도였다.

부스 안에서 버튼을 눌러도 사이렌이 울리거나 문이 닫히지도 않았다. 112신고에 필요한 수화기도 먹통이다. 수화기에는 '동전을 넣고 번호를 입력해달라'는 기계음이 나왔지만, 동전 투입구는 막혀 있었다.

즉 이 마을에서 범죄자와 마주쳐도 안전부스를 이용조차 하지 못하고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4시간 CCTV 녹화 중입니다'라는 글씨도 적혀 있었지만, 관할 구청에 문의해 보니 이미 고장 난 상태였다. 안내문도 햇볕에 그을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근처 등산로에도 안심부스 1대가 설치돼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였다.

일부 어르신들은 안전대피소가 아닌 공중전화 부스로 알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56년째 살고 있는 A씨는 "평소에 사람이 없는데도 사이렌이 갑자기 윙윙 거리며 울릴 때도 더러 있었다. 새벽에 울리면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며 "천장 아래 구멍에 쇠고리를 넣으니 멈추더라. 구청과 경찰에 문의를 몇번 했지만 매번 아무런 조치를 해주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혼자 사는 한 어르신은 "누군가 밤에 창살을 흔들 때가 있어 문을 꼭 잠그고 잔다. 가끔 겁이 날 때가 있다"고 말했다.

동구 수정동 경남여고 뒤편에 있는 안전부스의 경우 정상 작동이 되긴 하나, 원래 구에서 설치할 계획이던 긴급전화 스크린기기나 CCTV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도 해돋이마을전망대에 설치된 안전부스.2023.8.31/뉴스1 박상아 기자

안전부스는 2010년 여중생을 납치 살해한 '김길태 사건'을 계기로 설치됐다. 어두운 골목길을 안전한 길로 탈바꿈하는 환경 정비(셉테드 사업)가 부산 곳곳에서 이뤄졌다.

법무부와 경찰, 지자체 등이 설치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돋이마을 안전부스는 2014년 지어졌다.

하지만 취재 결과 안전부스 관리 주체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다. 부스 설치에 참여했던 법무부 산하 범죄예방위원회나 경찰, 구청 등은 서로 담당할 책임이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구청은 지금도 안전부스 운영 전기료를 매달 납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작동이 멈춘 사실은 취재진을 통해 알게 됐고, 현재까지 전기료가 어떻게 납부되고 있는지에 대한 경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부산 내 안전부스 현황에 대한 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범죄예방위원회는 △영도구 청학동 △동구 수정동 △금정구 회동동 △사상구 덕포동 등 4곳에 설치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금정구와 사상구는 이미 철거했다는 게 구의 입장이다.

결국 추진된 지 오래된 사업인 데다 관리 소재를 제대로 지정하지 않은 탓에 마을 치안을 지킬 안전부스가 이도 저도 아닌 시설물로 전락한 것으로 분석된다. 구와 경찰은 시설 유지보다는 철거 방향으로 논의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묻지마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기관마다 지역 치안에 손 놓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영도구 관계자는 "해돋이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견 수렴을 거친 뒤 부정적인 의견이 많으면 법무부와 경찰 등과 협의해 철거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동구 수정동 안전부스 인근에 설치된 안심반사경이 깨져 있다.2023.9.1/뉴스1 ⓒ News1 박상아 기자

blackstamp@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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