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날두 고향에서 시작된 추악한 제도…인류의 혀를 길들였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3. 9. 2.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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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2 - 가장 추악한 제도가 만든 달콤함, 설탕

아프리카 대륙에서 약 520㎞, 포르투갈에서 약 1000㎞ 떨어진 곳에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이 있다.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본격적인 대항해시대에 뛰어들기 전에 점령했던 섬이다.

마데이라 섬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두 가지다. 우선 세계적인 축구 영웅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호날두의 고향이 바로 이곳, 마데이라다. 마데이라 사람들이 호날두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이곳 공항의 이름이 아예 ‘마데이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국제공항(Aeroporto Internacional da Madeira Cristiano Ronaldo)’이다.

또 하나는 와인이다. 마데이라와인은 1776년 7월 4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마신 건배주로 쓰였을 뿐 아니라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취임식 축하주로 쓰일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마데이라 와인에는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원래 포르투갈이 마데이라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심은 작물은 사탕수수였다. 지중해의 섬들에서 이슬람들이 키우던 사탕수수를 가져와 심었다. 마데이라섬에서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저지를 식민지 경영과 수탈의 전형을 만들었다. 포르투갈은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생산을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리고 왔다. ‘플랜테이션 농업+흑인 노예’의 결합을 처음으로 시험한 것이다.

나중에 사탕수수 산업의 중심지가 신대륙으로 옮겨간 뒤 마데이라 사탕수수밭에는 포도가 심어졌고 여기서 나온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다. 처음 마데이라 와인에는 별다른 특별한 점이 없었다. 더구나 대륙으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와인이 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를 막기 위해 사탕수수로 만든 주정을 와인에 넣은 주정 강화 와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유럽 대륙에서 생산되는 와인보다 도수가 높고 풍미가 독특한 마데이라 와인이 탄생했다. 그러니까 마데이와 와인에는 노예노동과 사탕수수 재배지로서 마데이라의 슬픈 역사가 숨어있는 것이다. 포르투갈의 역사학자 알베르토 비에이라는 마데이라를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 추악한 제도가 고개를 치켜든 곳이었다”고 평가했다. 사탕수수와 설탕 때문이었다.

축구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고향인 마데이라에 세워진 자신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출처 = BBC]
인간이 가장 악독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가장 달콤한 물질. 바로 설탕이다. 새하얀 설탕을 얻기 위해 유럽인들은 식민지를 만들었고, 흑인을 노예로 만들었고, 노예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렇게 얻은 설탕으로 그들은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를 즐겼고, 달콤한 케잌을 만들었다.

달콤함 속에 숨어있는 가장 비통한 이야기, 오늘은 설탕 이야기다.

인간의 단맛 선호는 생존 본능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은 ‘단맛’을 본능적으로 좋아한다. 에너지원으로 가장 먼저 쓰이는 포도당에서 느껴지는 맛이기 때문에 단맛을 좋아하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 특히 채집생활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은 나무에서 과일이나 열매를 따먹은 경험을 통해 쓴맛은 독, 단맛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익혔기 때문에 단맛에 대한 선호가 DNA 각인된 것이다. 과학적으로 사람들이 단것을 먹으면 뇌에서 모르핀을 맞은 경우와 비슷한 반응을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단맛이 엄마의 향기로 기억되기 때문에 좋아한다. 모유에 들어있는 유당이 단맛을 내기 때문에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접하는 맛이자 향이 단맛이라는 것. 갓난아기가 단것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자궁에 있을 때부터 단맛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단맛에 대한 선호가 본능이기는 하지만 문화권에 따라 선호도의 차이는 존재한다. 생태환경, 이로 인한 음식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단맛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하게 될 수도 있고 약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맛을 자연에서 쉽게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자연 상태에서 단맛을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벌꿀이다. 하지만 그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어느 문화에서건 벌꿀에 대한 우선권은 권력자가 갖고 있었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헌 것은 인류에게 축복이었다. 사탕수수는 기원전 3000년경 뉴기니에서 처음 재배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탕수수가 바닷길을 따라 인도와 이슬람 지역으로 전해졌고 그 과정에서 설탕 제조법도 발달했다.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설탕 한 조각’을 가리키는 말이 ‘칸다(khanda)’였는데 그 말이 영어권으로 전해져서 캔디(candy)가 됐다. 이슬람 지역에서는 인도에서 전해진 단맛이 나는 약품을 ‘샤르카라(sharkar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바로 ‘슈거(sugar)’의 어원이다.

샤르카라라는 말처럼 근대 이전에 설탕은 너무 귀해서 사람들이 ‘약’으로 인식했다. 16세기까지 유럽의 의학계에서는 설탕에 결핵 치료 등 10여가지 이상의 효능이 포함돼 있다고 믿었다.

설탕에는 신비한 힘이 담겨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실이나 귀족 가문의 의례에 설탕으로 만든 장식품이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결혼식에서 웨딩케이크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전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 이전까지 설탕 산업은 거의 이슬람 세력이 독점했다. 이슬람 세력들은 이집트와 지중해의 섬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 제조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이집트에서 설탕 제조법이 발전했는데 사탕수수즙을 우유와 섞은 후 다시 끓여내 ‘가장 하얗고 깨끗한’ 설탕을 얻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중국도 이집트에서 설탕 제조법을 배워온 것으로 알려졌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칸의 궁정에 이집트인들이 몇 명 있었고 이들이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던 눈부시게 새하얀 설탕을 만드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고 기록했다.

사탕수수 있는 곳에 노예가 있었다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착취하기 이전부터 유럽 사회에는 노예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존재하던 ‘노예제도’와는 전혀 달랐다. 주로 십자군 전쟁에서 사로잡은 무슬림 병사나 아프리카인을 ‘하인’ 대신에 ‘노예’로 부리는 정도였다. 비록 자비로운 시스템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유와 권리가 주어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잔혹한 흑인 노예 제도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함께 시작됐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하기 전 포르투갈은 대서양 주변의 섬에서 이 같은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앞서 말한 호날두의 고향 마데이라섬에서 시도된 흑인 노예와 플랜테이션의 결합은 아프리카 기니만의 상투메 섬과 프린키페 섬에서 보다 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그곳은 열대 전염병의 위험이 높았던 지역이기 때문에 흑인 노동력을 이용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16세기 상투메섬 표면의 3분의1이 사탕수수로 덮힐 만큼 번창했다. 울창하던 숲은 설탕제분소의 아궁이 뗄깜으로 잘려나갔다. 소수의 유럽인들은 수천의 흑인노예를 사슬에 묶어 잔혹하게 다루었다. 이 때 상투메섬은 착취국가의 원형이었다.

가혹한 착취가 지속되니 저항 역시 끊이지 않았다. 기회만 되면 흑인들은 탈출했고 도망자들은 숲속에서 무장단체를 구성해서 싸웠다. 1595년 반란에서는 무려 5000명의 노예들이 사탕수수 제분소 30곳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 후 사탕수수 재배의 중심지는 브라질을 거쳐 카리브해의 섬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여기에는 사탕수수라는 작물의 특성이 크게 작용했다. 사탕수수는 토지의 생산력을 급속히 빼앗아 가는 식물이기 떄문에 늘 새로운 땅을 찾아 이동해야 했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정제하는 과정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시간의 문제였고 또 다른 하나는 불의 문제였다. 사탕수수를 베어내면 달콤한 수수대가 빠른 시간안에 딱딱한 나무처럼 변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 24시간 안에 수숫대를 통에 넣고 끓여야 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옆에 정제 시설까지 갖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백인 농장주들은 사탕수수 밭 옆에 바로 정제 공장을 세우고 흑인 노예 노동을 강제로 동원한 것이다.

트리니다그토바고의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이 나라의 총리를 지냈던 흑인 역사가 에릭 윌리엄스는 “설탕이 있는 곳에 노예가 있다”고 주장했다.

흑인 노예 노동에 의존해야 했기 떄문에 사탕수수 농장은 주로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등 카리브해서 섬 중심으로 발달했다. 노예들이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이 육지보다 낮아 관리가 쉽기 때문이다.

1823년 서인도제도 안티과 섬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사탕수수를 자르고 있는 흑인 노예들의 모습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사탕수수섬에서 일어난 최초의 흑인 혁명
1700년대까지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밍그(Saint Domingue 현재의 아이티)는 세계 설탕 생산의 중심지였다. 8000여개에 달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있었고 4만명의 부유한 농장주와 그 가족들이 50만명 가까운 흑인 노예들을 착취했다.

1789년 본국인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이 소식이 식민지 아이티에까지 전해졌다.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인권선언의 정신이 흑인 노예들을 흔들어 깨웠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혁명 후 들어선 프랑스 공화국은 영국과의 전쟁에 휘말렸다. 막강한 해군을 자랑하던 영국군은 아이티에서 프랑스 본국으로 들어가는 설탕 수익금을 차단하기 위해서 아이티의 거점도시를 점령했다. 1794년에 상륙한 영국군이 1798년에 물러나는데 그들을 퇴각시킨 것은 프랑스군이 아니었다. 바로 황열병 바이러스였다.

1794년 6월에 도착한 영국 군대는 그해 12월까지 매달 10% 가량씩 죽어나갔고, 1796년 2월 도착한 1만3000명의 증원군 중 6000명이 몇주만에 죽었다. 1798년 영국군은 결국 짐을 쌌다.

이때쯤 흑인 노예 출신의 혁명가 투생 루베르튀르가 프랑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사이 프랑스 본국에서는 나폴레옹이 쿠데타에 성공해 집권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현금 창고같은 아이티의 사탕수수 산업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1802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6만5000명을 아이티에 파병했다. 투생은 반란군을 이끌고 산악지대로 후퇴했다. 황열병의 계절이 올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였다. 투생은 프랑스군에 생포됐지만 프랑스 병사들도 황열병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2만8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1804년까지 프랑스군은 5만명의 병사를 잃고 물러갔고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은 그해 독립을 선언한다. 사탕수수의 섬 아이티에서 최초의 흑인 혁명이 일어난 것은 사탕수수 농장의 가혹한 착취 구조 때문이었고 그들에게 독립이라는 선물을 안겨준 것은 황열병 바이러스였다.

아이티에서 흑인 노예의 반란은 미국 역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이티에서의 전쟁에 발목이 잡혀 있었던 나폴레옹은 아메리카 대륙 내의 드넓은 프랑스 영토였던 루이지애나를 미국 정부에 팔아버린 것이다. 이 때의 루이지애나는 지금의 미국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멕시코만에서 시작해 북서쪽으로는 로키산맥의 미시시피강 상류까지 뻗어 있는 땅으로 지금의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을 합친 것과 맞먹는 면적이었다.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영토가 두 배 넓어졌을 뿐 아니라 미시시피강 너머 태평양에 이르는 서부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아이티 흑인 혁명을 이끈 투생 루베르튀르의 그림
설탕이 가져다 준 축복과 형벌
영국이 홍차의 나라가 된 것은 설탕 때문이었다. 17세기까지 홍차는 영국 상류층의 문화였다. 중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홍차에 귀한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은 그들이 부를 과시하는 소비의 한 형태였다.

17세기 후반부터 카리브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값싼 설탕이 영국으로 들어오면서 홍차 문화는 서민계층으로 확대돼 영국을 홍차로 나라로 만들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홍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은 밀크티가 노동자들의 음료가 됐다. 식민지에서 설탕의 공급이 폭증하면서 설탕 가격이 내려갔기 때문에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가득 넣은 밀크티는 영국 도시 노동자들에게 단백질과 당분의 공급처이자 피로 회복제였다.

리버풀이나 맨체스터 같은 공업도시에서는 공장 안에 호각 소리가 울리면 노동자들이 일제히 몰려 나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밀크티를 재빨리 마셨다. 티 브레이크(tea break)는 이렇게 시작됐다. 설탕이 들어간 밀크티를 마셔가며 당시의 영국 노동자들은 장시간 교대근무를 견뎌낸 것이다.

그러니까 설탕은 산업혁명 시대 영국 공장들이 가동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기초식품이 되었다. 1800년 영국인 한사람은 연간 설탕 18파운드를 소비했고 1900년에는 연간 소비량이 90파운드로 5배 늘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이처럼 설탕 소비로 지탱됐다.

19세기 영국의 노동자들이 티브레이크를 갖는 모습
설탕 생산 증가로 사치품이었던 설탕이 생활필수품이 되면서 인류의 식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부분의 음식에 설탕이 조미료처럼 들어가면서 음식이 달아졌다.

수렵채집 시절 인류는 늘 음식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에 인간은 유전적으로 음식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서 몸 안에 에너지를 축적하도록 진화했다. 여기에 본능적으로 단맛을 선호하는 유전자가 함께 작용하면서 오히려 인간에게 위험이 되는 상황까지 왔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대사질환은 설탕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형벌같은 것이다. 굶주림이 생존을 위협할 때 필수적이었던 에너지 저장 능력과 단맛에 대한 선호가 오히려 인간에게 해로운 형질이 되고 만 것이다.

사탕수수 밭에서 자란 대한 독립의 의지
1902년 12월 22일, 미국 증기선 게일릭(Gaelic)호가 새벽 어둠을 찢는 긴 기적소리를 울리며 제물포항을 출항했다.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이 배의 3등석 칸에는 56명의 남자와 21명의 아낙, 25명의 어린이 등 총 102명의 한인들이 미지의 신천지인 하와이에 대한 기대와 불안으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역만리로 이들의 등을 떠민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특히 1901년과 1902년, 전국을 휩쓴 가뭄과 홍수는 땅에만 목숨을 부지하고 살던 많은 농민들을 유랑민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 사탕수수 농장들은 해외의 노동자들의 이민을 받아들여 노동력을 채웠다. 처음에는 주로 필리핀 노동자들이 와서 일을 했고 뒤이어 일본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마침 1902년 들어 일본인·중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로 골치 아파하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한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모집’을 알리는 광고를 전국에 뿌렸고 대한제국도 수민원(輸民院)이라는 인력수출기구를 만들어 이를 후원했다.

당시 모집광고지는 “하와이는 기후가 온화해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고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일년 내내 어떤 절기든지 직업을 얻기가 용이하다”고 적고 있다. 이 광고지는 “하와이는 나무에도 돈이 열린다”는 소문과 함께 퍼져나갔고 지원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첫 배가 도착한 후, 1905년 일제에 의해 하와이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7226명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중 80%이상이 남자들로 이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갈 1910년 무렵부터는 결혼문제가 이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와서 10년 가까이를 이성을 만나지 못하고 지냈으니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등장한 것이 소위 ‘사진신부(Pictue Bride)’들. ‘사진신부’란 중매쟁이가 건네준 남편감의 사진만을 들고 하와이로 시집온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1910년부터 24년까지 951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시집갔다.

‘아메리카로 가는 길’의 저자 웨인 패터슨은 사진신부들이 초기 이민자들의 성공적인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고 지적했다. 남편들은 부인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했고, 부인들은 자식교육에 앞장서 훗날 2·3세들이 성공하는 데 밑거름을 쌓았다.

1902년 12월 22일 찬 새벽 바람을 뚫고 게일릭호의 갑판에 오른 102명의 한인들은 ‘한국 이민사의 콜럼버스들’이었다. 그리고 미주 이민의 역사는 사탕수수로 인해 시작됐다.

하와이 이주민들은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해외 독립운동 후원세력으로서의 역할도 크게 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다는 소식이 하와이 교민에게 전해지자 하와이 교민 1595명이 3236달러를 모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안중근 의사 구제공동회’에 송금했다.당시 하와이에 거주한 한인을 4533명으로 추산하는데 한인의 35%가 기부자로 이름을 올린 셈이다.

이들이 1920년대까지 독립지금으로 보낸 액수만 300만달러가 넘는다. 당시의 일당이 70센트∼1달러였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엄청난 액수다.

안창호 이승만 등은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고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한인들의 돈을 모아 이를 상해임시정부 등의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금을 받아 독립운동을 벌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이 됐을 때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대학을 설립했다. 바로 인하대다. 인하대라는 이름 자체가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의 합성어다. 물론 대학 설립비용도 이 대통령이 해외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민자들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자금 중 사용하고 남은 돈이 종잣돈으로 쓰였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한인들의 독립의 꿈만 자란 것은 아니다. 중국과 대만이 동시에 국부로 추앙하는 쑨원은 10대의 대부분의 날들을 하와이에서 보냈다. 쑨원이 다섯 살 때 형인 쑨메이가 사탕수수 노동자로 하와이로 건너왔다. 쑨원이 열두살이 되는 해인 1879년 쑨메이는 동생을 하와이로 불러들였다. 쑨원은 영국 성공회가 운영하는 이올라니학교에 입학해 3년만에 졸업한 뒤 하와이 최고 고등 교육기관인 오아후대학교에 진학한다.(현재는 추나호우학교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 중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있다,) 쑨원은 하와이의 학교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가치를 배웠고 이것이 신해혁명의 기치가 됐다.

하와이에 먼저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이 새 이민자들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
설탕에서 시작된 반도체 신화
일제 강점기 국내의 설탕 소비는 일제의 공급 정책에 의지했다. 국내 유일의 정제당 공장인 ‘일당 조선공장’에서 생산된 설탕을 사용했다. 문제는 ‘일당 조선공장’이 평양에 있었다는 점. 해방이 되고 남북이 분단되자 남한에서는 설탕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미국의 원조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보내는 설탕 원조량은 들쑥날쑥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공급이 불가능했다. 1947년 4월 미 군정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설탕배급문제’를 묻는 질문에 “미국도 설탕이 부족하기에 다량의 설탕을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밀무역과 암거래 시장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밀무역은 중국 무역업자들이 주도했다. ‘정크선 무역’으로 불린 이 밀무역을 통해 주로 일본에서 생산된 설탕이 마카오를 거쳐 국내로 들어왔다. 남북 사이에도 설탕 밀교역이 이루어졌다. 평양에 일당 조선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1948년 당시 북한에서는 설탕 1근에 130~150원에 거래된 반면 남한에서는 1근에 최고 1560원 까지 치솟았기 때문에 밀거래만 성사되면 10배의 차익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경제 재건과 물가안정을 위해 산업 정책의 중심을 수입대체화로 전환했다. 설탕 국산화 정책도 여기에 포함됐다.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기업인들도 움직였다. 삼양사의 김연수는 1952년 아들 김상하에게 일본 정제당 사업에 대해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삼성물산의 이병철도 1952년 일본 미쓰이물산으로부터 제당업, 제지, 제약사업 등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미쓰이물산은 ‘기술, 수익성, 공장 건설기간을 고려할 때 제당업이 가장 빨리 착수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자문했고 이병철도 이 자문을 따랐다.

1953년 삼성물산과 삼양사가 정부에 정제당 산업지원금을 신청했다. 삼성물산은 지원금을 받게 됐고 삼양사는 탈락했다. 삼양사 측에서는 김연수의 형 김성수가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제동을 거는 야당 정치인이어서 탈락했다고 믿었다.

초창기 제일제당 공장 모습
이병철은 정부의 특별외화자금 18만5000달러에 상공은행에서 받은 2000만환 융자를 더해서 제당 공장 설비 비용을 조달했고 1953년 6월 자본금 2000만환으로 제일제당 창립총회를 열었다. 제일제당은 1953년 11월부터 정제당 생산에 들어갔다.

당시 국내 제당업은 원료당을 수입해서 이를 정제하는 형태였는데 1954~1955년 수입된 원료당이 전량 제일제당에 배정됐다. 이 덕분에 제일제당은 빠르게 성장했다. 1953년 자본금 2000만환이었는데 다음해 이익금만 자기자본의 8배가 됐다. 창립 2년만인 1955년까지 두차례 증자를 통해 자본금 2억환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59년 일어난 쿠바혁명이 한국 제당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설탕 원료를 쿠바에 의지하고 있던 미국의 설탕 무역체제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1959년부터 미국의 원료당 원조가 전면 중단됐다. 하지만 쿠바혁명으로 인한 충격은 길지 않았다. 국내 제당 기업들은 늘어나는 국내 설탕 소비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원료당 수입 루트를 확보해 사업의 자립도를 높였다.

이처럼 제조업으로서 삼성그룹은 설탕 산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설탕이 없었다면 오늘의 삼성그룹도, 반도체 코리아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역사의 행로를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구 위의 여러 생물들과 자원, 물건들이 결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은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사물들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분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기자 페이지(https://media.naver.com/journalist/009/75254)를 구독하면 빼먹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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