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순간을 영원처럼’ 핀카 바카라 예야
표지로 책 내용을 가늠하지 말라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
‘겉만 보고 속을 판단하지 말라’는 오래된 격언(格言)이다.
와인도 그렇다. 겉면(레이블)만 보고 고른 와인이 ‘신의 한수’가 될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소비자 상당 수가 와인을 겉면만 보고 고른다. 세계적 와인 석학 마스터 오브 와인(MW·Master of Wine) 리즈 타슈는 2016년 와인닷넷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해 “미국 소비자 가운데 80%가 와인을 살 때 겉면만 보고 고른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와인병 겉면에는 만든 사람과 장소, 병에 넣은 시기에 대한 정보가 들어간다. 조금 더 친절한 경우 포도품종 정도를 더 적는다. 나머지 부분은 포도밭이나 와이너리 스케치가 채운다.
모두 배경지식이 없으면 적으나 마나한 내용이다. 미국 소비자 열에 여덟이 그림만 보고 와인을 고르는 이유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시중에서 팔리는 맥주나 소주 브랜드는 대부분 우리에게 익숙하다. 어디를 가든 아는 브랜드 한 두개는 있다.
그러나 와인은 다르다. 백화점 혹은 마트만 가도 수백가지 와인이 누워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와인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수입하는 와인 역시 월등히 많아졌다. 장 보러 갈 때마다 못 보던 와인이 새로 생겼다는 뜻이다.
편하게 마실 와인을 찾는 소비자들은 갈수록 많아지는 와인 종류와 병마다 빼곡히 적힌 정보가 버겁다.
미국 뉴욕 디자인에이전시 아이언디자인 통계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은 와인을 고를 때 생산자나 병입 시기, 포도 품종을 따지기 보다 ‘얼마나 이름이 독특한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답했다. 심지어 어느 해에 만들었는지 보다 와이너리 로고가 구매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향은 15달러(약 2만원) 이하 와인을 살 때 더 두드러진다. 소비자들은 비싼 와인은 겉면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며 심사숙고해 고른다. 반면 편하게 마실 와인들은 첫 인상만 보고도 거침없이 결제한다.
심리학계에서는 사람이 첫인상으로 호감 혹은 비호감을 판단하는 데 0.3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 판단을 기반으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시간도 고작 3초에 불과하다.
와인에 소비자 시선이 머무는 시간도 이와 비슷하다. 일부 와인 생산자들은 수많은 와인들 사이에서 소비자에게 강렬한 첫 인상을 주기 위해 과감하게 글자 넣기를 포기한다. 대신 와인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나 사진으로 접근한다.
스페인 와이너리 핀카 바카라(Finca Bacara)는 2016년 문을 연 신생 와이너리다. 와이너리가 자리잡은 후미야는 스페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건조한 지역이다. 연간 강수량이 300밀리리터에 그친다. 서울 여름 한 철 강수량 3분의 1 수준이다. 동시에 기온은 40도까지 올라간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 여름 한때 기온은 42도를 기록했다.
핀카 바카라 와인을 관리하는 셀러 마스터 이레네 고메즈와 최고경영자(CEO) 이오나 파우네스쿠는 이런 혹독한 환경을 추상화로 나타냈다.
대표와인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Time Waits for No One)’에는 초창기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걷는 코끼리를 그렸다. 혹이 있어야 할 코끼리 등에는 하얀 바닐라 꽃을 넣었다. 내리쬐는 태양처럼 진한 검붉은 과실향과 부드러운 바닐라 향을 동시에 갖춘 이 와인을 한 폭의 그림으로 대신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이 와인은 검은색 해골에 노란색 와인 이름을 넣는 디자인으로 바꿨다. 와인 마시기를 망설이는 소비자에게 ‘좋은 사람들과 와인 한잔을 즐기는 인생’이라는 새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와인을 따는 특정한 한 순간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스토리에 맞는 매력적인 겉면을 가진 와인을 고른다.”
로베르타 리베조 핀카 바카라 수출 매니저
예야는 핀카 바카라가 만드는 유일한 화이트 와인이다. 예야라는 이름은 바다의 여신을 의미한다.
겉면에는 물고기를 안은 인어가 그려져 있다. 이 와인을 만든 핀카 바카라 와인 메이커는 와이너리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해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영감을 얻었다.
밀물로 들이칠 때는 강하고, 썰물로 밀려나갈 때는 약한 파도를 보면서 이를 힘과 사랑을 동시에 갖춘 바다의 여신 같은 와인으로 표현했다.
강한 파도를 상징하는 샤르도네 포도 품종과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모스카텔 데 알레한드리아는 핀카 바카라가 아니면 좀처럼 보기 어려운 조합이다.
스페인 유명 와인 매체 기아 페냥은 ‘순간 들이쳤다 이내 사라져버리고 마는 파도를 영원(永遠)처럼 간직한 와인’이라고 평가했다.
이 와인은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서 구대륙 화이트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CSR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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