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군국주의를 경계하다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폴란드의 연극배우 조피아 칼린스카는 연기지도를 받는 젊은 여배우들에게 목소리를 키우라고 말하곤 했다. “목소리를 키우라는 건 크게 말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본인이 원하는 바를 소리 내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느끼라는 뜻이죠. 우리는 원하는 게 있을 때 기어이 주저하고 말죠. (……) 하지만 여러분이 그 소망을 붙들어 언어로 표현할 준비가 되면, 그땐 속삭여 말해도 관객이 반드시 여러분 말을 듣게 돼 있어요.”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의 시선집 '처음 가는 마을'을 읽었을 때 칼린스카의 이 말이 떠올랐다. 시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소박하지만, 금세 귀 기울이게 만드는 강한 힘이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마구 걸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흘러나왔다
금연 약속을 어겼을 때처럼 비틀거리며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몹시도 불행한 사람
나는 몹시도 모자란 사람
나는 무척이나 쓸쓸하였다
그래서 다짐했다 되도록 오래오래 살자고
나이 들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일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의 학교 교육은 전시체제에 돌입한다. 당시 여학생들은 교복 대신 몸뻬 바지를 입고 현모양처 교육과 군국주의 사상 교육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철저한 ‘군국소녀’로 성장한 이바라기 노리코는 제국여자대학 약학부에 입학했다가 학도병으로 해군 의료품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패전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친구와 기차에 무임승차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개인적 욕망을 지우고 천황을 위해 희생하자는 멸사봉공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던 여학생은 이제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청소년기 내내 서양문명은 죄악이고 외국인을 만나면 스파이로 여기라고 배웠지만, 패전과 동시에 라디오에선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미국인들에게 굽신거리는 비굴한 이들로 거리가 술렁였다.
시인의 대표작인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한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전쟁 시기에 성장한 동시대 여성들의 슬픔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시는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을 뿐만 아니라 반전 노래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에게 애창되었다. 시인은 전쟁광들이 자신에게서 훔쳐간 것을 되찾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등단한 후 ‘미우라 노리코’라는 본명 대신 ‘이바라기 노리코’라는 필명을 쓴다. 일본 설화에서 이바라기는 자기 팔을 잘라 가져간 무사의 집에 사람으로 변신하고 들어가 팔을 되찾아 오는 요괴라고 한다.
천황의 무의미한 전쟁놀이로 젊은이들의 삶은 엉망이 되었다. 시대의 속임수를 알아차린 순간 여자아이는 화가 나서 폐허의 거리를 쏘다니지만 결국 자신이 무언가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는 어리바리한 상태임을 깨닫고는 몹시 쓸쓸해진다. 이 어리숙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여자아이는 오래 살아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던 노년의 프랑스 출신 화가 조르주 루오처럼 되겠다고 결심한다.
“고통이나 비참함 앞에서 달아나지 마라. 덧없는 이익들, 특권들, 일시적인 명예들 때문에 네 자신 안에서 네가 그리도 잘 느끼고 있는 것의 가장 작은 조각까지도 양보하지 마라.” 이렇게 말했던 루오는 노년에 발표한 판화집 '미제레레'(1927)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미제레레(miserere)’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는 라틴어 성경 구절에서 온 제목이다. 그는 총 58점의 도판을 만들어 번호를 붙였는데 33번까지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이야기를, 58번까지는 전쟁의 참상에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화가는 자신이 쓴 자작시나 전해 내려오는 경구들에서 각 작품의 제목을 가져왔다. ‘의인은 향나무 같아, 자기를 내려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힌다’(도판 49번)나 ‘때로는 맹인이 눈이 보이지 않는 자를 위로했다’(도판 55번)와 같은 제목이 루오의 작품을 본 여자아이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맹인이 다른 맹인을 어디론가 인도하는 광경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그러나 어쩌면 맹인이 같은 처지의 맹인을 가장 잘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밝은 눈으로 앞장서서, 모자란 이를 이끈다고 외치는 자들의 감언이설에 속는 대신, 아이는 조용히 멈춰 서서 어리숙하고 모자란 이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풍경을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바라기 노리코의 시에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시인은 술집에서 어느 취객의 사연을 들으며 그의 음성은 탁하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우아하다고 느낀다. “보상 없는 얼마간의 사랑을 제대로 받을 줄 아는 사람도 있고/ 숱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불만으로 가득한 녀석도 있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은 기억 없이 당당히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이자카야에서') 시인은 또 사이좋게 하교하는 두 소녀의 대화를 듣는다. “원래 엄마란 아주 고요한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라고 종알거리는 소녀들의 말에 시인은 “명대사로구나!” 감탄하며 덧붙인다. “엄마만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이란 누구든 마음 깊은 곳에/ 흔들림 없는 고요한 호수가 있어야만 해.”('호수')
시인은 자신이 들을 수 없는 말까지 듣기를 원한다. 그래서 1976년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글을 배운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한국은 군사독재가 판치고 천박한 일본인이 기생관광을 떠나는 나라이며 조선어를 하는 사람은 범죄자를 취조하는 이들뿐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다. 이런 주류의 부정적 시선에 아랑곳없이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국 시인들과 우정을 쌓고 한국 시를 번역해서 '한국현대시인선'(1990)을 출간했다. 시인은 이 책으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상보다 더 빛나는 건 '이웃나라 언어의 숲'에 담긴 시구이다. “일찍이 일본어가 밀어내려 했던 이웃나라 말/ 한글/ 어떤 억압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한글/ 유루시테구다사이(ゆるして下さい)용서하십시오/ 땀 뻘뻘 흘리며 이번에는 제가 배울 차례입니다.”
시선집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이바라기 노리코는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 우경화되어가는 일본 사회를 비판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공을 차는 사람'이란 시는 프랑스 월드컵 때 일본의 한 축구영웅이 “기미가요는 촌스러워 부르지 않는다. 시합 전에 부르면 전의가 꺾인다”고 했던 것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는 천황의 치세가 영원하기를 기원하고 있어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일본 교사들 중 일부는 정부가 지시한 기미가요 기립 제창을 거부하다가 정직되거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시인 역시 일본을 사랑한다면 “침략의 피로 더러워지고/ 칙칙한 검은 과거를 남몰래 감춘 채/ 입을 닦고 기립하여” 기미가요를 부르는 대신에 시골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민요를 부르자고 말한다('시골의 노래').
그동안 기미가요는 침략의 최대 피해국인 한국에서는 공식석상에서 연주되지 않다가, 올해 나루히토 일왕 생일 기념식 때 서울에서 처음으로 울려 퍼졌다. 주한 일본대사관이 한국 정부의 판단을 반영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반공을 빌미로 군사비 지출에 혈안이 된 양국 정부의 행태에 많은 시민이 절망을 느끼고 있다. 한 일본 기자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오염수 방류 결정은 일본이 전쟁 가능 국가로 전환하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두 나라 사람들이 평화와 환경을 지키기 위해 함께하길 바라는 듯, 시인은 오래전의 시 '6월'에서 썼다. “어딘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아름다운 힘은 없을까/ 동시대를 함께 산다는/ 친근함 즐거움 그리고 분노가/ 예리한 힘이 되어 모습을 드러낼”.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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