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부산 엑스포 지지” 일본은 왜 말 못하나
오사카 엑스포를
공개 지지했다...
이번엔 우리를
도와야 할 일본이
침묵을 지키는 건
무슨 까닭인가
외교부 내 일본통(通)을 일컫는 ‘재팬 스쿨’ 사이에 트라우마처럼 여겨지는 사건이 있다. 2002년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을 ‘물 먹은’ 일이다. 월드컵 공동 개최로 한일 간 우호 분위기가 무르익던 그해 8월, 고이즈미가 긴급 회견을 갖고 방북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한반도 정세를 요동치게 할 초대형 이벤트였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철저히 소외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이 한국에 통보해 온 것은 발표 몇 시간 전이었다. 일본은 1년에 걸쳐 중국 등에서 북측 밀사와 비밀 협상을 30여 차례 벌였지만 한국엔 알리지 않고 철저히 따돌렸다. 뒤늦은 통보에 주일 한국 대사관이 항의하자 일본 외무성은 “한국도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그러지 않았냐”고 받아쳤다고 한다.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존중한다면서도 당사자인 우리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북한과 뭘 해보려는 움직임은 지금 일본도 마찬가지다. 지지율 하락에 허덕이는 기시다 총리는 북에 납치된 일본인 송환에 사활을 걸고 있다. 2002년 김정일과 담판해 납북자 5명을 귀국시킨 고이즈미처럼 이 문제에 성과를 올려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것이다. 외교가에선 일본이 북한과 비밀 교섭에 돌입했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싱가포르에서 북·일 당국자가 두 차례 접촉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북한 쪽 반응도 심상치 않다. 지난 5월 기시다가 ‘일·북 고위급 협의’의 운을 떼자 북한 외교부는 즉각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화답했다. 국제 제재에 둘러싸인 북으로선 일본을 통해 활로를 뚫을 속셈일 것이다. 지난주 북한은 정찰위성을 쏘면서 일본에만 사전 통보했다. 석달 전 1차 발사 때도 추진체가 한국 영해 인근에 추락했지만 우리에겐 통보가 없었다. 한국을 배제하고 한·미·일 협력의 약한 고리인 일본을 흔들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배울 것 많은 대국(大國)이지만 국력에 걸맞은 ‘대국 외교’를 하는 나라는 아니다. 가치·원칙·대의 보다 눈앞의 손익을 따지는 ‘주판알 외교’를 구사한다. 현 기시다 정권도 마찬가지다. 한일 간 화해 무드에도 불구, 일본이 무언가 매듭을 푼다든지 통 크게 양보할 것이라고 과도하게 기대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파탄 직전까지 간 한일 관계를 복원시킨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이었다. 그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윤 대통령으로선 국내 여론 반발과 반일 역풍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이 구상은 일본의 적극적 호응을 전제로 한다. 기시다 정권이 자국 내 정치 논리에 집착해 ‘가치 연대’의 큰 틀을 보지 못한다면 한일 관계는 언제든지 다시 흔들릴 수 있다.
캠프 데이비드의 한·미·일 정상 회의에서 귀국한 기시다 총리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후쿠시마였다. 현지 어민과 만난 뒤 바로 각료 회의를 열어 오염수 방류를 결정했다. 한미 정상의 양해를 받은 듯한 모양새를 취한 것이었다. 애초 기시다는 오염수 문제를 캠프 데이비드 의제로 올리려고까지 했다. 그 부담은 압도적인 반대 여론에 시달리는 윤 대통령을 향할 수밖에 없다. 일본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자꾸 한국을 엮어 책임을 분담시키려는 행태가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일 간 최대 현안이던 강제징용자 이슈에서 윤 정부는 ‘제3자 배상’으로 문제를 풀었다. 우리 기업 돈으로 선(先)배상한 뒤 이른바 ‘전범(戰犯) 기업’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이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록 일본 기업들은 한마디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기시다 정부가 자국 내 여론을 의식해 기업 참여를 막고 있다는 추측이 나온다. 일본 측은 자기들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고 말하나 우리 기대치엔 한참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다.
어제까지 서울에서 열렸던 ‘한일 포럼’에서 일본 정부가 ‘2030 부산 엑스포’를 공개 지지해야 한다는 전문가 제안이 나왔다. 그 말을 듣고 사실 좀 놀랐다. 아니, 일본의 지지 표명이 없었단 말인가. 5년 전 ‘2025 오사카 엑스포’ 유치전 때 한국은 당시 이낙연 총리가 공개 발언을 하며 일본을 밀어주었다. 이번엔 일본이 도와줄 차례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엑스포 개최지 결정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까지 일본은 아무런 말이 없다. 물밑에선 사우디를 밀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윤 정부가 ‘일본 대변인’ 소리까지 들어가며 도와주었는데 일본이 딴 나라 편을 든다면 도의가 아니다. 한국으로선 뒤통수 맞았다고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일 화해 국면이 재개된 이후 양국의 반응은 ‘불안’과 ‘불만’으로 요약될 만하다. 일본은 한국이 또 바뀔까 봐 불안하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의 호응이 뜨뜻미지근한 게 영 불만이다. ‘엑스포 상호 지원’ 같은 기본 중의 기본적 협력조차 주저한다면 일본의 진심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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