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의 달달하게 책 읽기] 스위스 성공 비결, 은행 아닌 제조업 덕
몇 년 전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면서 정부가 대출 규제를 강화하자, 청년들 사이에서는 난데없이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앞의 세대들이 대출로 집을 사 한 재산 챙기고 나더니, 다음 세대 차례가 되니까 대출을 막아서 자산 형성의 기회를 박탈했다는 의미다. 19세기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자의 이 표현을 21세기에 다시 유행시킨 사람이 바로 장하준이다. 한국 경제학자 중에서 가장 노벨 경제학상에 가까이 간 사람 역시 장하준일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맹목적 시장 맹신의 허점을 다양한 음식, 정확히는 음식 재료와 함께 풀어나가는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부키)는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대영제국 해군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만들었던 쇠고기와 라임 같은 얘기는 물론이고, 더 이상 코카 잎을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 코카 콜라의 변천사, 미국 경제의 발전 등에 대한 이야기는 경제사와 인문학이 만나는 흥미로운 접점을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매우 논쟁적인 논문에서나 볼 만한 내용들을 부드럽게 접목시킨 것은 장하준식 글쓰기의 백미다.
“스위스 성공의 비결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은행이나 고급 관광 상품이 아니라 세계 최강의 제조업 부문이다.” 이 문장은 왜 장하준이 초일류 경제학자이자 세계은행의 최상급 자문인지를 보여준다. 1인당 국민소득 세계 1위를 차지한 국가가 가진 경제적 힘을 자유주의자들은 잘 설명하지 못하는데, 현실은 제조업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장하준은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고 싶어 한다. 브라보! 이 한 문장의 맥락을 앞뒤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한국 중고등학생이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장하준은 한국인이지만, 이 책은 한국 독자를 위해서 한글로 쓴 책이 아니다. 그래도 그 어느 책보다 마늘에서 현대자동차까지, 한국에 대한 얘기가 많다. 품위와 품격, 그리고 유머를 갖춘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학 책을 읽을 기회를 부디 놓치지 않으시길 바란다. 경제학만이 아니라 책을 구성하고 풀어나가는 텍스트로서도 혁신적이며 동시에 모범적인 책이다. 가장 편하게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접근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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