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검열에 반기 들고 망명? 제트스키로 340㎞ 건너온 밀입국 전말
“저는 제트스키를 타고 중국에서 출발해 지금 막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수상 모터바이크(PWC)’, ‘웨이브 러너’라고도 불러요. 현재 인천항 인근 갯벌에서 좌초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지난달 16일 오후 9시 16분, 인천소방본부 119 종합상황실로 이런 신고가 접수됐다. 영어를 쓰는 중국 국적의 30대 남성 A씨였다. 한국 유심카드가 없어 아이폰 긴급통화로 전화했다는 그는 “한국 비자와 여권이 있다. 입국 신고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인천해양경찰서는 A씨를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 중이다.
A씨가 말한 제트스키, 수상 모터바이크, 웨이브 러너는 모두 수상 오토바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제트스키는 일본 회사 ‘가와사키’, 웨이브 러너는 ‘야마하 모터’의 브랜드 이름이다. 국내에서 제트스키를 이용한 밀입국 시도가 적발된 건 처음이다.
◇국내 최초 제트스키 밀입국
인천해경과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이 소방청으로부터 받은 자료 등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16일 오전 7시 중국 산둥반도 웨이하이(威海)항에서 제트스키를 타고 출발했다. 몇 년 전부터 웨이하이에서 지내고 있던 그는 1년 전쯤 제트스키(약 1800cc)를 샀고, 자격증은 없지만 동북지방과 산둥(山東)성을 몇 번 오갔다고 한다. 자신의 제트스키가 2500만~3000만원짜리 일제라고 주장했다. 해경 관계자는 “몇 번 타 익숙하고 혼자 이동하기 때문에 제트스키를 밀입국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제트스키는 여럿이 타면 균형 잡기도 어렵고 속도를 내는 것이 불리하기 때문에 여럿이 밀입국할 땐 소형 보트나 고무보트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A씨는 출발 전 방수가 되는 노란색 가방에 나침반과 망원경, 간편식 4개와 물병, 여권, 비자 등을 담았다. 또한 25L 흰색 플라스틱 기름통 5개를 제트스키 뒤편 받침대에 로프로 고정했다. 70L까지만 기름을 채울 수 있는 제트스키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준비가 끝난 그는 그때부터 나침반과 망원경에 의존해 14시간 동안 약 340km 바다를 달렸다. 기름이 떨어지거나 배가 고프면 제트스키를 세워 기름을 채우거나 배를 채웠다. 목이 마르면 준비한 물을 마셨다. 파도는 이례적으로 잔잔했다. 평균 시속 20노트 안팎으로 이동한 그는 당일 저녁 무사히 한국 바다에 진입했다.
이날 오후 8시쯤 군 당국은 그의 제트스키를 발견해 감시·추적을 시작했다. 추적당하던 그의 제트스키는 이날 오후 9시 23분쯤 인천 송도 인천항 크루즈터미널 인근 갯벌에 좌초됐다. 군 당국은 즉시 해경에 연락했고, 옴짝달싹 못 하게 된 A씨는 119에 구조를 요청했다. A씨는 “물이 곧 차오르면 가라앉을 것 같다. 이쪽으로 오면 푸른색 레이저를 쏘겠다”고 말했다. 이후 A씨는 해경에 긴급 체포됐다. 조사 결과 제트스키를 개조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권운동가의 망명 시도?
국제연대활동가 이대선(31)씨에 따르면, A씨는 중국 인권운동가 취안핑(权平·35)이다. 2019년 8월부터 알고 지낸 A씨는 웨이하이에서 출발하기 전 이씨에게 “난 이틀 후 한국으로 갈 거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그 후 언론을 통해 A씨가 한국에 도착한 사실을 알게 된 이씨는 지난달 22일 면회하러 인천 해경 구치소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씨는 “A씨는 중국의 정치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온 것”이라며 “조사를 마치고 난민 신청 절차까지 무사히 마무리되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해경 관계자는 “A씨가 조사에서 망명과 난민 신청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씨에 따르면, A씨는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모두 한국계 중국인(조선족)이라고 한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2012년 미국으로 유학가 아이오와대를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씨는 “A씨가 항공학과를 나와 비행기조종사 자격증이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정부의 정치 검열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구금된 중국 인권변호사들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2016년 9월 1일에는 시진핑 주석을 풍자한 슬로건이 담긴 티셔츠를 입은 셀카를 트위터에 올렸다. 그러다 10월 1일, 그는 중국 당국에 체포돼 4개월 동안 독방에 구금됐고, 2017년 2월 15일 길림성 연변 재판소에서 ‘국가권력전복선동죄’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씨는 “중국 재판부는 그가 변호인과 면담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은 당시 해외에도 알려져 A씨의 석방을 요구하는 캠페인(#FreeKwonPyong)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2019년 만기 출소한 그는 일상생활로 돌아왔지만, 중국 당국은 감시를 이어갔다. 그러자 그는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이씨에게 연락했다. 그해 8월부터 준비한 망명은 중국 당국의 출국 금지로 무산됐다. A씨는 그 후 세 차례에 걸쳐 이씨에게 연락했지만, 2021년 이후 연락이 끊겼다. 지난달 14일 연락은 거의 2년 만에 온 것이었다.
◇바다의 무법자 ‘제트스키’
제트 스키를 이용한 밀입국은 유럽에서는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가장 흔한 루트는 모로코에서 출발해 스페인에 도착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최단 루트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신문 더 뉴 아랍은 “2015년 이후 제트 스키를 이용한 밀입국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며 “다른 수송수단보다 싸고, 빠르며,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제트스키를 이용해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오는 데는 1인당 1만유로(약 1439만원) 정도 든다고 한다.
제트스키, 즉 수상 오토바이는 로켓의 원리를 이용한 이동 수단이다. 후방에 고압의 수류를 분출함으로써 추진력을 얻는다. 처음 개발한 곳은 1968년 캐나다의 봄 바르디아사(社)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둔 곳은 1970년대 일본 가와사키다. 브랜드명인 ‘제트스키’가 지금까지 통용되는 것도 이때문이다.
제트스키는 선체가 작아 좁은 수로도 통행이 가능하고 회전이 쉬우며 비교적 간단한 조작으로 속도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하는 수상 이동 수단이다. 국내에서도 제트스키를 포함한 보트, 요트 조종면허자 수는 2011년 약 11만1000명에서 2021년 약 28만7000명으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반면, 어민은 2011년 약 17만7000명에서 2021년 약 9만3000명으로 47.5% 줄었다(현대해양). 바다의 핵심 소비자가 어민에서 수상 레저 인구로 역전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트스키가 바다의 무법자처럼 휘젓고 다니는 일도 발생한다. 지난 7월에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물살을 강하게 일으켜 지켜보던 아이를 다치게 한 혐의로 제트스키 운전자가 경찰에 입건됐다. 부산의 대표 사찰인 해동용궁사는 굉음을 내며 운행하는 제트스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제트스키를 타기 위해서는 면허를 따고, 원거리 운행을 하기 위해서는 해경에 신고를 해야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는 이용자도 많다. 해경 관계자는 “원거리 운행 전 신고를 하는 것은 출발 시각과 도착 예정 시각을 미리 받아 복귀하지 않을 경우 찾으려고 하는 것이니 주저하지 말고 신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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