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한 법관 인사제도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1980년대 초 법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법관의 근무 실적을 평가하기 위한 ‘법관근무평정제’ 즉 매년 말 법원장이 소속 법원 판사들을 평가하여, 이를 대법원장에게 보고하는 제도를 도입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젊은 법관 몇 사람이 법원행정처 차장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법관에 대한 근무 평가제도는 법관들을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법률과 양심에 따른 독립된 재판을 저해할 우려가 있어 그 도입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차장은 젊은 법관들에게 제도 도입의 취지를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지금은 법관 수가 수백 명에 지나지 않으니까 상급심에 올라 온 판결문 등 재판 기록이나 평판을 통해 법관들을 평가할 수 있으나, 장차 법관 수가 급증할 테니 미리 자료를 확보해두어야 공정한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두 해의 근무평정 자료는 반드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10년이나 20년 이상 쌓인 자료는 객관적인 소중한 인사 자료가 될 것이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러한 객관적 자료가 없다면 인사권자의 자의적이거나 불합리한 요소에 의하여 인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시 일본이나 독일에서는 이미 유사한 근무평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법관근무평정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렇게 도입된 근무평정제도는 법원의 공정 인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인사권자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좋은 의미의 굴레로 작용하였습니다. 법관들이 근무평정을 의식하면서 재판을 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자세를 바로잡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당연히 국민의 이익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과거 법원에서 지방법원 부장판사까지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연공서열 순서대로 승진하고,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시 비로소 사실상 최초의 심사에 의한 승진이 이루어졌습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자리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리 부족 때문에 승진을 못 하지만 유능한 법관들이 마지못해 법원을 떠나거나 계속 근무하더라도 사기가 저하되는 일이 생기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가적으로도 손실입니다.
법관은 가능한 한 법관직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승진 등에 괘념치 않고 정년까지 근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야 이른바 전관예우라는 부끄러운 말도 사라지고, 법원의 품격과 함께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높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법원행정처 실무자로서 대법원장께 건의하여 정부 예산 당국의 협조를 얻어 ‘법관 단일호봉제’를 도입하였습니다. 단일호봉제는 근속 연수에 따라 처우가 정해지는 급여 체계입니다. 이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 희망자의 신청을 받아 신청자 가운데 심사를 거쳐 그 자리를 채우되 법관의 처우는 근속 연수에 따라 정함으로써, 고등부장 자리가 승진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보직에 지나지 않도록 하는 형식을 취하여 제도적으로는 승진 탈락이라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지방부장으로 평생을 봉직하고자 하는 법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제도가 정착되었다면 우수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확보하면서도 법관의 퇴직이나 사기 저하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법원은 아예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폐지하였습니다. 승진제도에 따른 법관 사이의 위화감을 없애고 그 부작용을 없앤다는 명목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라 열심히 하여 제도적이건 사실상이건 승진하고자 하는 법관의 자기 성취 의욕 및 동기도 상당 부분 꺾인 결과가 되었습니다. 경쟁도 없어졌습니다. 그 틈새를 정실이 파고들 여지가 생겼습니다. 더욱이 법원장도 법관들의 사실상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니 법원장에 의한 법관에 대한 선의의 지도나 감독이 이루어지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와 같은 제도 개선이 재판 지연 등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선의의 경쟁, 올바른 평가와 승진 그리고 합리적 지도·감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피해는 국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