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한 번 못 갔지만 여기가 천국... 손님에게 인생 배웠죠”
“여기가 천국이에요. 나한테는.”
칠순이 되도록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다. 여행도 가지 않고 일군 식당은 지금도 매일 출근길이 즐겁고 퇴근길은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진상 손님 때문에 철철 울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손님은 왕보다 더 큰 존재다.
서울 마포 램랜드 사장 임헌순씨 이야기다. 램랜드는 양고기를 좋아한다면 한번쯤 방문했을 명소다. 양갈비를 숯불에 구워 토르티야에 올리고 옥수수와 올리브를 얹어 싸먹으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사장 임씨는 중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어릴 적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화장품 보따리 장사, 어묵 팔이 등 안 해본 허드렛일이 없다. 그런 그에게도 “글을 배워서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일흔에 그 꿈을 이뤘다. 최근 ‘인생학교 램랜드’를 출간한 임헌순씨를 지난 16일 만났다.
◇“경쟁사 없던 양갈비가 가장 쉬운 장사”
램랜드는 1989년 마포에서 문을 열었다. 임씨가 일하던 정육점 사장이 차린 식당이었다. 그때만 해도 양고기 수요가 많지 않았던 터라 매출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수입 고기를 늘 목표치보다 더 팔았던 임씨는 “식당에서 책임자로 일 좀 해보라”라는 제안을 받고 램랜드와 인연을 맺었다. 1993년이었다. 1년쯤 일하다 그만두고 육아를 하다가 “나도 내 일을 한번 해봐야지”란 생각으로 1999년 램랜드를 인수했다. “빚으로 시작했어요. 첫 달은 적자였죠. 그래도 너무 재밌었어요. 명절 때 말고는 쉬지 않고 달렸죠.”
-고생을 참 많이 했더라고요.
“배운 게 없었으니까요. 지인이 내가 식모로 가면 큰 오빠를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고향(충남 연기군)을 떠나 경기도 어느 집으로 갔어요. 솔직히 식모가 뭔지도 몰랐는데 돈을 준다지, 친구들 중학교 가는 것도 안 봐도 되니까 ‘좋다’고 간 거죠. 그런데 가서 매일 밤 울었어요. 3년 하다가 더 부잣집으로 갔어요. 그런데 그 집 딸이 나랑 동갑이었어요. 밤에 잠이 안 왔지. 그 길로 도망 나왔어요.”
-안 해본 일이 없더라고요.
“화장품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고 속옷도 꿰매고 옷에 구슬을 달기도 하고. 수퍼에서도 일해봤죠. 양장점에 취직해서 심부름도 하고 샘플 나오면 미니스커트 입어보는 일도 하고 그랬어요.”
-쉽지 않았네요.
“그런데도 돈이 없어서 쌀뜨물에 소금 넣어 끓여 먹고 그랬죠. 너무 못 먹어서 결핵도 걸리고요.”
-양고기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정육점에서 알바를 하다가 내가 잘 파니까 백화점에서도 해보라고 한 거예요. 열심히 했죠. 근데 ‘오늘 얼마 팔 거야?’ 이렇게 매일 물어요. 그래서 얼마라고 하면 기가 막히게 그만큼 파는 거예요.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은혜였지 뭐예요. 그러다가 그 사장이 하던 램랜드를 맡아서 책임자로 가게 됐어요. 사실 나는 못 살아서 외식도 한 번 못해봤는데 음식 장사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근데 그때도 잘 팔았어요.”
-1999년에 아예 인수했는데.
“그때 램랜드 사장님이 ‘이 힘든 걸 왜 하려고 하냐’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랬어요. ‘양갈비가 제일 쉬운 거 같아요. 경쟁사가 없잖아요. 나만 잘하면 가게가 잘 될 거예요’라고.”
-처음부터 잘됐나요?
“아니죠. 단골은 있었지만 줄을 설 정도는 아니었는데 전국 방송을 타고 하면서 입소문이 났어요.”
◇책 출판은 오랜 꿈
누구는 돈을 많이 벌었다고 그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늘 마음이 무거웠다. “돈을 다 이고 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니에요. 나는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에 딱 하나, 책 쓰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요새는 책 출간 소식에 손님들이 ‘역시 사장님은 남달라’ 하면서 최고라고 치켜세워줘요.”
-책은 왜 썼나요.
“내가 이렇게 잘살지는 몰랐어요. 고생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성공하고 나니 혼자 간직할 게 아니라 과거의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원래는 62세 때 정년퇴직하고 글을 좀 배우고 싶었는데 남편 반대로 일을 못 그만뒀지요. 그래서 좀 아팠어요. 손님들이 ‘사장님은 돈 많이 벌어서 좋겠어’ 이러면 그 말이 칼처럼 나를 찌르는 거 같았어요. ‘나는 나를 위해 산 적도 없고 일만 하는데, 돈 좀 많이 번다고 좋다고?’ 속이 곪았죠.”
-그래서요?
“3~4년을 낮 장사에 안 갔어요. ‘그러다가 손님 다 떨어진다’는 걱정을 들었는데, ‘돈 벌면 뭐하나’ 이런 생각까지 했죠. 그러다가 확 손님이 줄더라고요. 연말인데도 예약이 꽉 차질 않았어요. 다시 나왔죠. 손님들이 전부 반겨줘요. 내가 뭐라고. 그때 ‘내가 미쳤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살맛이 났어요. 여기가 천국이구나. 저는 여행도 가본 적 없어요. 제주도도요. 어딜 가봐도 좋은지를 모르겠어요. 여기가 더 좋으니까요.”
-그래도 결국 책을 냈어요.
“포기했었어요. 그런데 어떤 출판사 사장님이 내 친구와 양고기 먹으러 왔다가 얘기를 듣고 ‘한번 써보시라’고 했죠. 배운 게 없으니 못 쓴다고 했는데 ‘그냥 일단 써보라’고 해서 작년 12월부터 시작했어요. 매일 식당 문 닫고 집에 가서 식탁에 앉아 몇 시간씩 썼어요.”
-힘들지 않았나요.
“너무 재밌는 거예요. 잘 쓰지 못하지만 얘기하는 것처럼 종이에 손으로 썼지요. 너무 잘한 일 같아요. 잘 써지는 날엔 새벽 4시 30분까지 쓰기도 하고. 출판사 사장님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쓰는 분은 처음 본다’고 하더라고요.”
-가족들 반응은요?
“전부 관심도 없었죠. 남편도 ‘내 흉 보려고 열심히 쓰나 보다’ 했다고 그래요(웃음). 근데 진짜 책이 나오니 신기해하죠.”
◇손님에게 인생을 배웠다
오전 10시 30분이면 어김없이 가게에 나와 장사를 준비한 지 20여 년. 그런 성실함은 손님들 때문이라고 했다. “가끔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좋은 분들이 훨씬 더 많아요. 제가 왜 램랜드를 ‘인생학교’라고 하겠어요. 손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세상을, 기쁨을, 배려를, 감사를.”
-왜 책 제목이 ‘인생학교’인가요.
“저는 손님 때문에 살아요. 처음에 장사 안 된다고 하면 일주일에 네 번, 다섯 번씩 사람들 데리고 오는 손님도 있었고요. TV에 나가려는데 손님이 없어서 막막했을 때도, 단골이 직원들 데려와서 자리를 채워줬죠. 돈도 안 받으려고 하면 끝까지 내고 가고요. 요새도 밖에 줄을 서 있으면 손님들이 먼저 ‘빨리 먹고 빨리 가자’고 해요.”
-양고기집이 여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나한테 계속 ‘고맙다’고 해요. 내가 돈을 버니까 내가 고마워야 하는데 말이죠. 저한테는 손님은 전부예요. 인생의 모든 걸 가르쳐줬어요.”
-기억에 남는 손님이라면.
“장사를 하면 별별 사람을 다 보죠. 그러나 하나, 노력은 배신을 안 해요. 진짜 부자 손님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안 오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택시기사 옷을 입고 딱 들어오더라고요. 웃으면서 ‘사장님, 나 망했어’ 그래요. ‘그동안 많이 팔아줘서 오늘은 돈 안 받겠다’고 하니까 ‘왜 이래. 나 밥 굶을 정도는 아니야’ 이러면서 끝까지 계산을 하더라고요. 또 몇 년이 흘렀어요. 사람을 엄청 데리고 왔어요. 대기업에 높은 자리로 취직이 됐다고요. 기분 좋은 기억이에요.”
-또 있나요.
“너무 많죠. 저는 뭘 팔러 오는 사람들과도 친하게 잘 지냈는데요. 한번은 어린애가 겨울에 ‘빵꾸’ 난 점퍼를 입고 온 거예요. 난로에 타서 그랬대. 막 얘기를 하는데 한 손님이 ‘뭔 얘기 했냐’고 물어요. 그래서 말을 했더니 수표 10만원짜리를 주면서 ‘옷 사입히라’고 해요.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에요.”
◇많은 시행착오 끝에 ‘램랜드식’ 정착
단골들은 양갈비 맛도 맛이지만 가족 같은 편안함에 끌려 다시 램랜드를 찾는다고 한다. 실제 임씨 딸 둘과 사위들이 함께 홀서빙을 해왔다. 임씨가 램랜드를 인수했을 때부터 함께한 직원이 아직도 같이 일하고 있다. 이날도 임씨는 가게 주방에서 바지를 무릎까지 말아 올리고 쪼그려 앉아서 직원들과 함께 양파를 다듬고 있었다.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죠?
“시골 오빠였어요. 키도 크고 당대 최고 미남인 알랭 들롱을 닮아서 쫓아다니다 결혼했죠. 그때는 어려워서 딸 낳고 결혼식을 했어요.”
-딸, 사위도 일을 돕더라고요.
“우리 엄마도 98세까지 여기 나와서 일했어요. 어릴 때 어묵 같이 팔던 내 친구도 여기 인수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같이 있어요. 10년 넘은 직원들도 있고요. 나한테는 이 친구들이 친형제보다 더 가까워요.”
-장사 잘되면 가족끼리 싸움도 나던데요.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똘똘 뭉쳐서 일하니까요. 아직은 내 것, 네 것 이런 게 없어요. 혹시 나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죠. 하하.”
-프랜차이즈 등 사업 확장 제안도 많았지요?
“그렇죠. 확장하면 돈은 많이 벌겠죠. 그런데 저는 맘 편히 사는 게 좋아요. 가게 늘리면 신경 쓸 게 많잖아요. 저는 줄 선 손님한테도 ‘오늘은 딴 거 먹으세요’ ‘근처 양고기집 가세요’ 했어요.”
-위기는 없었나요?
“메르스, 사스, 코로나 등 불황기에도 장사는 적당히 잘됐어요. 좀 안 돼도 늘 긍정적으로 생각했고요. ‘우리 이럴 때 푹 쉬자, 벌어놓은 거 좀 까먹으면 되지’ 하면서요.”
-램랜드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요?
“레시피가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엔 즉석에서 잘라주는 게 싱싱한 줄 알고 바로바로 잘라서 줬는데, 고기가 남으니까 하루, 이틀, 사흘까지 지난 걸 팔았어요. 근데 손님들은 다 알아요. 사흘 숙성된 게 더 맛있다는 거예요. 나흘째는 색이 변해요. 다 경험으로 배웠죠.”
-반찬도 달라요.
“처음엔 소금만 있었는데, 상추, 깻잎 같은 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근데 너무 맛이 세서 별로예요. 그러다가 빵하고 같이 먹으면 어떨까 하다가 토르티야까지 온 거고요. 옥수수, 올리브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지금의 램랜드식은 2003년쯤 완성된 거예요. 말하자면 ‘헌순이식’이죠(웃음).”
◇남은 생은 좋은 일 하고파
책은 지난 5월 세상에 나왔다. 임씨가 자비로 사서 여기저기 돌렸다. “수익을 내려고 쓴 책이 아니에요. 여기저기 나눠주고 누구라도 이 책을 읽고 희망을 갖고 힘을 얻었다면 그걸로 된 거예요.”
-책은 좀 팔렸나요.
“1만부 이상 찍었다는데 진짜 팔린 건 몇 백권이나 될까요. 상관없어요. 내 꿈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거거든요.”
-이제 꿈을 이뤘으니 여행도 좀 가셔야죠.
“아니요. 전 여기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나요?
“지금까지는 나와 가족을 위해서 살았어요. 이제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어요. 다 갖고 갈 수 없으니까요. 또 내 삶을 간증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고 싶어요. 오드리 헵번처럼 살다가 죽는 게 꿈이라면 꿈이죠. 하하. 그만큼 큰일은 못 하겠지만 아름답게 살다가 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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