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재정 중독’ 빠져나와야 한다더니
“스스로 중독자라고 시인하는 사람은 잘 없어요.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었다. 그렇게들 변명하죠.” 마약 수사 경험이 있는 베테랑 수사관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중독(中毒). 국어사전에 따르면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를 가리킨다. 또는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한다. 중독의 습성을 떠올린 것은 뜬금없게도 내년도 예산안 발표를 지켜보면서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656조9000억원으로 편성했다. 정부는 지출 증가율을 2.8%로 묶어 재정 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 20년 만에 가장 낮은 증가율을 보였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허리띠를 바짝 졸라맸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문재인 정부 5년간 평균 증가율(8.9%)보다는 한참 낮은 수준이다.
문제는 역대급 세수 감소로 나랏빚이 1200조원에 달하고,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3.9%까지 불어난다는 것이다. 관리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에서 매년 흑자를 기록 중인 국민연금 등 4대 보장성 기금을 뺀 것으로 실질적인 나라 살림을 보여주는 지표다. 정부는 건전 재정 유지를 위해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3% 이내로 유지하는 ‘재정 준칙’을 발의,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번 예산안에서 정부는 스스로 만든 재정 준칙을 어기는 모순을 보였다. 기획재정부는 “내년에는 관리재정수지 적자 GDP 대비 3% 초과가 불가피하지만 2025년 이후부터는 재정 준칙을 준수하고 점진적으로 개선하도록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달리 말하면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기시감이 들었다.
중독에서 예산안을 떠올리는 연상 작용에는 대통령도 일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말 주재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재정 중독’이라는 표현을 썼다. 윤 대통령은 “일각에서는 여전히 재정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빚을 내서라도 현금성 재정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이것은 전형적인 미래 세대 약탈이고 따라서 단호히 배격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재정 중독을 경계해야 한다는 정부도 재정 준칙을 어기며 중독자와 유사한 화법을 쓰는 실정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건전 재정 측면만 본다면 지출 증가율을 동결하거나 오히려 마이너스로 가져가야 했지만, 국가 본질 기능인 국민 안전·국방·미래 대비 등 돈을 써야 할 곳에는 제대로 규모 있게 써야겠다 판단하고 고심 끝에 2.8%를 정했다”고 했다. 그 고민을 십분 이해하지만 원칙을 어긴 점에는 변함이 없다. 수년간 돈을 푸는 데 익숙했던 정부가 정권이 바뀐다고 그 습성을 단박에 바꾸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재정 준칙을 어긴 내년도 예산안은 재정 준칙의 추진 동력을 크게 약화시킨 것이 틀림없지만, 역설적으로 재정 준칙의 필요를 더욱 부각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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