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문화가, 예술이 너무 지루해졌다
안전하고 따분한 작품 양산
예술은 늘 禁忌와의 투쟁
善보다 美를 만나고 싶다
9월의 소슬바람이 시작됐으니, 여름의 천막을 치울 때다. 텐트폴 영화란 표현이 있다. 최고의 감독과 배우, 그리고 거대 자본을 투입해 흥행을 노리는 여름용 상업 영화. 7말8초에 개봉한 텐트폴 영화 네 편의 성적이 처참하다. 가장 많이 본 ‘밀수’가 500만을 겨우 넘었고, ‘콘크리트 유토피아’ 345만, ‘비공식작전’ 105만, ‘더 문’은 겨우 51만의 참패다. 비싸진 영화표 가격만 탓할 일일까. 그렇지 않다는 데 더 큰 우려가 있다.
SF 장르에서는 아직 한국 관객의 애국심에 호소할 수 있다고 믿은 ‘더 문’, 하정우의 연기 외에는 소재도 주제도 지난해 영화 ‘교섭’의 재탕이었던 ‘비공식작전’은 열외로 치자. 류승완 연출의 ‘밀수’는 액션 긴장감에 비해 드라마 밀도가 성글었고, ‘콘크리트 유토피아’ 역시 화면의 독특함을 제외하면 결국 아파트 소재의 윤리 교과서였다. 제작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재미도 미학적 충격도 약했다는 뜻이다.
영화만의 문제이고 한국만의 현상일까. 나는 요즘 문화가, 예술이 지루해졌다고 생각한다. 예일대 영문과 교수를 지낸 윌리엄 데러저위츠의 에세이 ‘문화가 너무 따분해졌다’를 읽고 난 뒤에 그 생각이 더 굳어졌다. 물론 순간을 소비하는 자극적 엔터테인먼트는 넘쳐난다. 인터넷의 중독적인 짧은 영상들은 매일매일 쏟아지고,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는 물량으로 현혹하며 결정장애까지 호출한다. 문학, 음악, 미술의 순수예술도 하루 걸러 신인상과 수상작을 발표 중. 하지만 금기(禁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시장(市場)과도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지도를 그려내는 예술을, 당신은 요즘 만끽한 기억이 있나. 임윤찬과 BTS,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착시효과로 속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선(線)을 넘지 않을 만큼만 격렬하고, 시간 때우기 좋을 만큼만 도발적이다.
앞에서 금기의 위협이라고 썼다. 역사적으로 예술은 늘 금기와의 투쟁이었지만, 요즘 그 최전선에는 PC(정치적 올바름)가 있다. 도덕 선생님이 우리를 선한 인간으로 안내할지는 모르겠지만, 예술과 미의 세계에서도 늘 옳은가. 디즈니의 흑인 인어공주와 라틴계 백설공주 사례를 보라. 작가와 감독은 이제 자신의 감정·상상력이 아니라 윤리라는 완장의 지배 아래 있다. 차별의 용어, 혐오의 발언은 절대 금지. 하지만 솔직해지자. 위선과 허위를 벗기고 나면, 문화예술의 세계에서 압도적 미남미녀는 그 자체로 승자다.
소위 영미권의 ‘캔슬 컬처’도 마찬가지. ‘취소 문화’가 아니라 ‘제거 문화’로 번역해야 옳을 이 전체주의의 홍위병들은 논란의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아예 모든 업적을 제거하겠다며 달려든다. 노년에도 재기 넘쳤던 감독 우디 앨런은 그렇게 할리우드에서 제거됐고, 재능 많던 흑인 방송인 샘 오취리의 한국 일자리는 날아갔다.
기업화된 문화산업과 소셜미디어는 능란하게 대중의 취향을 표준화하며, 빛의 속도로 재생산한다. 풍요가 가져온 몰락이랄까. 이런 교육부 통계가 있다. 1999년 우리나라 대학의 예체능 계열 학과 숫자는 920개. 2020년에는 1732개.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술가가 두 배로 늘어났다고 해서, 미학적 쾌감이 두 배로 증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타깝지만, 예술대학 졸업생들이 지루함을 견디며 선택해야 하는 직업 1위는 그 학과 수험생의 과외선생이다.
윤리 교과서와 양적 풍요가 가져온 역설. 요즘 문화와 예술은 너무 지루해졌다. 기억해 두시길. 이 세계에서는 오직 실력 없는 자들만이 결과가 아니라 선의를 봐달라고 강변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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