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은 왜 이승만을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했나?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민족의 영웅” 이승만의 환국
이승만은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워싱턴DC 자택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자신의 집에 모여든 동지들에게 그는 “소련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다. 미국이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이틀 후인 8월 8일, 이승만은 백악관에 귀국 청원 편지를 보냈다. 군 작전 지역이었던 한국으로 귀국하려면, 이승만은 미국 정부로부터 세 단계의 승인이 필요했다. 우선, 1912년 미국 망명 이후 줄곧 무국적자로 살아온 그는 국무부에서 출국 여권을 교부받아야 했다. 또한, 한반도를 관할하는 주한미군사령부와 태평양지구 미육군사령부에서 작전 지역 여행 허가를 얻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 입국을 위한 군용기 사용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승만의 귀국은 하지 중장, 맥아더 원수, 국무부가 모두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좌익이 주도한 남한 정국의 타개책이 필요했던 하지 중장은 이승만의 귀국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국무부의 비우호적인 태도가 문제였다. 불과 석 달 전, 이승만은 “미국이 얄타에서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겼다”며 소위 ‘얄타 밀약설’을 언론에 폭로해 미국 정부를 궁지로 몰아붙였다. 태평양전쟁을 조기 종식시키기 위해 소련의 지원과 협조가 절실했던 국무부로서는 철저한 반공·반소주의자 이승만이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8월 10일 전쟁부, 8월 28일 국무부에 귀국 신청을 했다. 예상대로 국무부는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도 이승만은 ‘고집불통 늙은이’로 불리던 인물답게, 귀국 허가가 나올 때까지 묵묵히 거듭해서 미국 정부를 설득했다. 8월 백악관에만 5차례 전보와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의 비공식 정치고문 역할을 자임했던 현직 OSS(CIA의 전신) 부국장 굿펠로 대령은 국무부를 수차 방문해 “왜 이승만에게 귀국을 허가하지 않느냐”며 항의했다.
미적거리던 국무부는 종전 20일이 지난 9월 5일에야 이승만에게 여권을 발급했다. 하지만 얼마 후 미군 작전 지역 여행허가서에 기재된 ‘주미 한국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이라는 직함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이승만의 여권을 취소했다. 이승만은 국무부를 찾아가 “아무런 직위도 필요 없으니 조용히 귀국하게 해달라”는 뜻을 전하고 여권을 재발급받았다. 9월 29일 맥아더는 이승만의 한국 입국을 최종 허가했다. 국무부가 요청한 여타 재미 한인의 입국 신청을 모두 불허했던 맥아더의 예외적인 조치였다.
10월 4일 밤, 이승만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워싱턴DC에 남겨둔 채 ‘한국에 돌아가는 한국인’ 자격으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하와이와 괌을 경유해 12일 도쿄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예의를 갖춰 다섯 살 연상의 이승만을 맞았다. 이승만이 워싱턴DC에서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극진한 환대였다. 맥아더는 이승만의 도쿄 도착에 맞춰, 하지를 도쿄로 불러 이승만과의 회담을 주선했다.
이승만과 맥아더는 모두 반공·반소주의자였다. 또한 두 사람 모두 미국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함께 아는 친구도 많았다. 맥아더의 정치고문이자 필리핀 출신 국제정치계의 실력자 로물로는 이승만의 각별한 친구였다. 로물로는 워싱턴DC에서 이승만의 이웃집에 살면서 가족처럼 지낸 인연이 있었다. 도쿄에서 이승만은 ‘전(前) 한국위원회 위원장이자 1919년 임시 대통령’ 자격으로 맥아더와 2차례 회담했다. 맥아더는 하지에게 이승만을 ‘돌아온 민족의 영웅’으로 환영하라고 지시했다.
10월 16일 오전, 이승만은 맥아더가 제공한 군용기로 도쿄를 출발해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한 지 33년 만의 귀국이었다. 해방된 지 두 달 만의 늦은 귀국이었지만, 그나마 해외 독립운동가 중 가장 빠른 귀환이었다. 그의 남다른 집요함과 외교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 정계와 군부에 구축해놓은 폭넓은 인맥 덕분이었다. 그의 귀국은 비밀에 붙여졌기 때문에 비행장에 환영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승만은 하지의 배려로 미군 고위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승만의 귀국 소식은 이튿날 미군정 당국이 주선한 내외신 기자 회견으로 일반에 알려졌다. 하지 중장은 친히 이승만을 옛 총독부 청사 내 기자회견장으로 안내했다. 이승만은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며 자신은 ‘평민 자격’으로 귀국했으며 독립을 위해 초당파적으로 단결하자고 강조했다. 그날 밤 7시 30분 경성중앙방송국은 이승만이 육성으로 녹음한 귀국 성명을 방송했다. “모든 정당과 당파가 협동하여 우리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을 찾는 것이 나의 희망하는 바입니다.”
귀국하기 이전 이승만은 우익은 물론 좌익에서도 최고지도자로 추대된 상태였다. 9월 14일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해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에서 이승만은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9월 16일 창당한 한국민주당(한민당)에서도 ‘7인의 영수(領袖)’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모든 정파가 이승만을 최고지도자로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조선공산당의 노력은 이례적이었다.
귀국 이튿날 오후 2시, 여운형(부주석), 허헌(국무총리), 최용달(보안부장), 이강국(체신부장 대리) 등 인공 수뇌부가 조선호텔로 이승만을 예방해 ‘주석’에게 8·15 이후 국내 상황과 인공 수립 과정을 보고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했다. 곧이어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이승만 귀국 환영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 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3000만 민중의 경앙대망(敬仰待望·공경하며 우러르면서 기다리고 바람)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있다. (…)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 인민 총의(總意)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해방 조선은 독립 조선으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滿腔)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매일신보’ 1945.10.18.)
공산주의자들은 전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는 이승만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그를 인공 주석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인공의 주석으로 취임하면 공산주의자들의 포로가 된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올리버 교수에게 보낸 편지(1945.10.21.)에 이승만은 이렇게 썼다. “무엇보다도 우스운 사실은, 공산당이 나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구성했다는 것이오. 나는 그들에게 소련이 반공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나를 공산당의 지도자로 삼아주니 정말 영광이라고 말해 주었소.”
이승만은 특정 정파의 지도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덮어놓고 뭉칩시다!”라며 모든 정파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하나가 되자고 호소했다. 그는 한민당과도, 인공과도 거리를 두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좌우파를 아우르겠다는 실패가 예정된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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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올리버, 한준석 역,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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