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범죄’ 목숨값 평균 6000여 만원, 두 번 우는 유족들
피해보상 부족한 ‘묻지마 범죄’
지난달 20일 고려대 구로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살해 사건 피해자 A씨의 빈소에서 지인들은 고인의 순직 인정 필요성에 입을 모았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A씨가 방학 중 연수를 위해 출근하던 길에 참변을 당한 만큼 순직 처리가 필요하단 것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와 서울교사노동조합 등 교원단체에서도 논평을 통해 “고인을 공무상 재해로 인정, 순직 처리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19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도 “순직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신질환 범죄는 피해보상도 어려워
교육계에서 순직 처리에 한 목소리를 낸 건 이 사건이 피해자에게 가혹한 ‘묻지마 범죄’였기 때문이다. 범행 동기나 징후 없이 찾아온 묻지마 범죄는 손해배상 능력이 없는 은둔형 외톨이나 정신질환자의 단독 범행인 경우가 많아 피해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이 사건의 피의자인 최윤종(30)씨는 특별한 직업 없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당한 사람만 억울한 처지에 놓인 셈이다. 교육계의 요청대로 순직이 인정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보상방안이란 얘기다. 현직 공무원의 순직 시 유족에겐 ‘전체 공무원 기준소득월액’(2022년 기준 539만원)의 24배 수준인 보상금(1억2936만원)이 지급된다. 여기에 공무원 사망 당시 기준소득월액의 38%가 유족연금으로 제공된다. 하지만 순직 처리가 되지 않으면 피해 보상은 이보다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묻지마 범죄로 인한 안타까운 피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피해자를 돕기 위해 우리 법에선 지원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헌법에 범죄피해자구조청구권(제30조)을 규정해 놓은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에선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른 ‘구조금’과 범죄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 업무처리지침에 따른 ‘지원금’ 등으로 피해자를 지원한다. 이 가운데 피해자 사망 시 지급되는 유족구조금은 피해자의 월 실수입 또는 평균임금의 24~48개월 수준에서 책정된다. 지원금으로는 치료비, 심리치료비, 생계비 등이 지원된다. 하태인 경남대 경찰학과 교수(한국형사법학회 이사)는 “우리의 법체계는 개인의 사적 제재를 금지하는 대신 국가가 먼저 개인의 안전 보장 의무를 갖는 체계(헌법 제10조)라 범죄 피해자가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원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다. 실제로 2016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사망한 20대 여성 피해자 유족에게 지급된 유족구조금은 6641만원에 불과했다. 피해자에게 특별한 귀책사유가 없었던 만큼 비슷한 연령·직업의 피해자라면 이 이상의 구조금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범죄피해자구조심의위원회에선 피해자의 귀책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례적으로 기소 전 유족구조금 전액을 지급했다. 현행 구조금 제도에선 피해자의 월간 실 급여의 24~48개월치(최대 1억6000만원)를 구조금으로 지급한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지급된 유족구조금의 평균액은 6091만5000원이다.
치료비, 심리치료비, 생계비 등 지원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범죄 피해로 인해 5주 이상의 치료를 해야 하는 신체적 피해를 본 경우 정부에선 연 1500만원, 총 5000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금을 지급한다. 이 때문에 지난 8월 발생한 ‘분당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으로 뇌사 상태에 빠진 피해자의 입원비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법무부에선 “지원할 수 있는 액수를 초과하면 특별심의를 거쳐 추가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추가 지원할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피해자 지원 규모를 상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소속의 한 변호사는 “최근 묻지마 범죄의 안타까운 상황이 부각되면서 특별심의를 통해 피해자 지원 규모를 늘리고 있으나, 모든 피해자가 특별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안내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하태인 교수도 “특별심의를 통해 지원을 늘리는 것은 피해자에게 반가운 일이지만, 모든 범죄 피해자를 들여다 보기엔 한계가 있다”며 “법무부 중심의 피해자 보호 방안 외에도 경찰, 지자체 중심의 피해자 보호 방안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범죄피해자구조금 상한 없어
문제는 재원이다. 국내에선 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원으로 범죄자들의 벌금을 활용하고 있다. 거둬들인 벌금의 8%를 떼어내 범죄피해자보호기금을 조성한 뒤 피해자 지원에 사용하는 식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범죄 피해자 보호기금 예산은 1133억4700만원이다. 이 기금은 2022년과 2021년 각각 1001억1400만원, 1099억8500만원을 기록하며 1000억원대 초반에서 유지되고 있다. 범죄자에게 부과하는 벌금이 갑자기 증가하기 어려운 데다, 범죄자들이 벌금 대신 노역을 선택할 수 있어 단기간 금액이 증가하기 어렵다는 게 기금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재원의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반면, 써야 할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묻지마 살인 사건처럼 흉악범죄 피해자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범죄의 지원 예산으로 활용되는 탓이다. 실제로 이 기금은 범죄피해자구조금을 지급하는 법무부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 등 다양한 기관에 배분된다. 더구나 피해자지원센터나 보호시설 등 기관 운영에 들어가는 간접 지원비가 피해자에게 지급되는 직접 지원비를 넘어서는 상황이다. 김지선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피해자 지원 단체가 가장 많은 곳이 여성가족부인데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관련 단체들에 대한 지원비를 범죄피해자보호기금에서 쓰다 보니 인건비 등 고정성 지출이 피해자에게 돌아가는 직접 지원비보다 많은 상황”이라며 “흉악범죄가 늘면서 지원 수요는 느는데 재원은 그만큼 늘어나기 어려운 만큼 인건비 등 간접 지원을 줄이거나, 재원을 변경해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직접 지원 규모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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