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뫼 조선소서 2년간 지옥훈련, ‘조선보국’ 기틀 다졌다
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②한국인 첫 로이드 검사관
조선업 중심, 유럽서 아시아로 넘어와
부두에는 미군해양수송서비스(MSTS) 소속 화물선이 하루에도 수십척씩 들어와 군수물자를 내려놓았다. 신 회장은 그렇게 큰 배를 처음 봤다. 3000t급 전차상륙함(LST)과 1만5000t급 고속수송선에서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 식량이 끝없이 쏟아졌다. 신 회장은 “어렸을 때 책에서 본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구절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난 셈”이라며 “가슴 속에 ‘나도 저런 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뜻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이듬해 입시에서 신 회장은 서울대 조선항공공학과(현재 조선해양공학과)를 지망한다. 신 회장의 본가는 경북 봉화였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까지 장날이면 한복 차림이 드물지 않았던 보수적인 지역이다. 그의 조부는 구한말 법관을 지낸 신언집이고, 부친은 서울고등법원장 출신의 신도순 변호사였다. 게다가 그는 종손이었다.
“그 시절에는 부자간에 대화가 별로 없잖아. 대학교 시험 칠 때쯤 날 보고 아버지께서 ‘공부는 하고 있겠지’, 그게 전부야. 당연히 법과 공부하는 줄 아셨겠지. 그리고 합격자 발표하니까 ‘합격했겠지’ 하시는 거야. ‘네’ 하고 대답하니 ‘이제 사법고시 준비를 빨리해야지’라고 하시네. 아들이 공대를 지망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셨던 거지. 문중에서 난리가 나고, 결국 집에서 쫓겨났어요.”
전쟁 중 공부는 힘겨웠다. 구덕산 비탈의 풀밭에 둘러앉아 영어와 일본어 교재를 교수와 학생이 함께 세미나식으로 토론하며 유체역학과 구조·재료를 공부했다. 46년 설립한 서울대에서 첫 졸업생을 배출한 무렵이다. 조선 분야는 석사 이상 학위를 받은 전문가도 없었다. 이 분야 명문으로 꼽히는 미국 MIT, 일본 도쿄대, 영국 킹스칼리지의 교재를 구해 돌려봤다. 광주보병학교에서 10주간 장교 훈련도 받아야 했다. 전황이 나빠지면 언제든 전선으로 투입할 일종의 대기조였다. 전쟁이 끝난 후 겨우 서울로 돌아왔지만 멀쩡한 건물이 없어 동숭동 일대에 학과별로 뿔뿔이 흩어졌다.
코쿰스 조선소는 스웨덴의 항구도시 말뫼에 자리 잡고 있다. 좁은 바다 건너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과 마주 보는 곳이다. 워낙 위도가 높아 오전 10시나 돼야 해가 뜨고 오후 3시면 어두컴컴해진다. 하지만 제공한 숙소는 침대방에 개인 욕실이 딸려있었다. 부드러운 화장지에 귀한 소금·후추·버터가 지천이었다. 전쟁의 폐허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아방궁이나 다름없었다. 사무실에 가니 응접실만한 방을 혼자 쓰라고 줬다. 조선소에서는 3만t급 배를 만들고 있었다. 부산에서 본 것보다 10배는 컸다. 하지만 고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지금 만드는 배의 도면이라며 설계도를 책상 하나 가득 주는데 읽을 수가 없어요. 이론적으로 수치 계산하라면 하겠는데 도면 읽는 공부는 못했거든. 일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고민했지. 이런 일도 못한다고 돌아가라면 내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데. 결국 기술 책임자에게 자수했어요. 쫓아내려면 쫓아내고, 죽이려면 죽여라, 이런 심정이었지. 그 사람도 기가 막힌 모양이야. 그래서 기능공 기초 실무교육에 넣어달라고 요청했지.”
코쿰스에서는 기술고등학교를 나온 신입을 대상으로 한 12주짜리 교육과정이 있었다. 낮에는 현장에서 실습하고, 저녁에는 오후 11시까지 이론을 가르쳐 시험을 치렀다. 신 회장은 “지옥 훈련이 따로 없었지만, 도면 읽는 것부터 조립까지 평생 뼈와 살이 되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교육을 마치고 설계실에 돌아오니 그제야 도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웨덴에서 조선과는 7년 과정으로 이론과 실무를 모두 가르쳤다. 대학을 나오면 라이센스를 받고, 당연히 책임자급으로 조선소에 가는 구조였다. 서울대에서 수학과 역학 중심의 이론 교육만 받은 신 회장이 처음부터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버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낮에는 회사 일을 하고 밤에는 찰머스 공대에서 수업을 듣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나마 회사와 학교에서는 영어라도 통했지, 시내에 가면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한번은 이발소에 갔는데 이발사가 머리를 깎은 후 손뼉을 한번 치더니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 쳐다보니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신 회장은 “못 보던 동양인이라고 차별하냐는 생각에 사무실로 돌아와 동료에게 울분을 토했더니 박장대소를 하더라”며 “알고 보니 얼굴에 바를 로션을 고르라고 향을 맡게 해준 것인데 말이 통하지 않아 오해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현대중, 1달러에 크레인 구입 ‘말뫼의 눈물’
먼 훗날의 얘기지만 신 회장에게 도약의 기회를 준 코쿰스도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했다. 7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 조선소들이 무섭게 성장하면서 경쟁력을 잃고 87년 파산했다. 스웨덴 정부의 지원에도 부활하지 못하고 2002년 조선소 부지와 장비를 모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73년 설치한 이후에 말뫼의 상징이던 높이 140m, 중량 7000t의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을 현대중공업이 1달러에 사들여 울산으로 가져왔다. 철거·운송·재조립 비용 220억원은 현대에서 부담했지만, 크레인을 철거해 배에 실리는 과정을 지켜본 수많은 말뫼 시민은 눈물을 흘렸다. 이 사건을 스웨덴 국영방송이 레퀴엠과 함께 중계하면서 세계 조선업의 중심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간 것을 상징하는 ‘말뫼의 눈물’로 남았다.
말뫼를 떠나 런던에 자리 잡은 신 회장은 로이드에서 월급으로 150파운드를 받았다. 아침을 주는 숙소가 주 3파운드 하던 시절이다. 신 회장은 “이공계 대학원생이 받는 장학금이 월 30파운드였으니 주머니가 얼마나 두둑해졌는지 감이 올 것”이라며 “이 돈으로 런던 교외에 이층집을 마련했다”고 회상했다. 이 집은 곧 ‘소사관(小使館)’이라 불리며 젊은 한국인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아지트가 됐다. 대사관 직원들이 면세로 술과 담배를 사서 가져오고, 교환 교수와 유학생들이 1인당 10실링(당시 돈으로 0.5파운드)씩 걷어서 장만한 음식으로 파티를 열었다. 김유택 당시 주영대사 부부도 종종 참석했다. 이때의 인연이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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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의 폐허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일어서기까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일등공신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선입국 의지를 실천에 옮겨 한국을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만든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KOMAC) 회장도 그 반열에 들 인물이다. 신 회장에게는 ‘조선업의 아버지’란 수식어 외에도 국가건설기획자 (nation building architect) 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고, 과학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 집행하여 한국기술연구원(KIST) 설립과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 경제발전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중앙SUNDAY는 한국 경제사의 산 증인을 인터뷰해 묻혔거나 잊힌 비화를 발굴하고 교훈을 탐색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92세인 지금까지 경영 일선을 지키며 새로운 기술과 미래 먹거리 창출에 도전하고 있는 현역 최고령 조선인 신동식 회장이 구술한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들어본다.
」
※정리: 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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