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만에 무대서 만난 대원외고 동창 바리톤, 응답하라 1988…“그 시절 그대로죠”

유주현 2023. 9. 2.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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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광장오페라 ‘카르멘’ 출연 한규원·유동직
광장 오페라 ‘카르멘’에서 에스카미요 역에 더블캐스팅된 바리톤 한규원(오른쪽)과 유동직. 8일 공연에 한규원, 9일 유동직이 나선다. 김상선 기자
광화문 광장에 첫 야외 오페라가 오른다. 올해 세종문화회관이 처음 시도한 세종썸머페스티벌 폐막 프로그램인 ‘카르멘’(9월 8~9일)이다. 100여 명의 시민들로 구성된 합창단·무용단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 그 자체인 무료 공연으로, 사전 좌석 신청이 조기 마감되는 등 관심이 뜨겁다.

비제의 ‘카르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중 하나인데, 저 유명한 ‘투우사의 노래’를 부를 에스카미요 역에 한규원(51)과 유동직(51)이 더블 캐스팅됐다. 둘 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해외파 바리톤이지만, 최근 국내 대학에 적을 두면서 왕성한 활동을 예고했다.

두 사람은 동기동창인데, 예고나 음대가 아니라 대원외고 같은 반을 다녔다. 공부벌레들만 모이는 인문계 명문고를 함께 다닌 절친이 직업이 같다면 대체로 법조인이나 공무원일 터. 둘 다 바리톤이 되어 같은 오페라에 더블 캐스팅 된 것은 초유의 일이다. 두 사람이 한 무대에 서는 것도 처음이다.

“89년 하반기에 노래를 시작해 34년 만에 처음 같은 공연을 하게 됐는데, 영 현실감이 없네요. 규원이는 90년 미국에, 저는 95년 이탈리아에 가서 죽 해외 활동을 했고, 가끔 만나도 노래 얘기를 하진 않거든요. 노래 이전에 만난 친구니까요.”(유) “만나면 늘 그 시절로 돌아갈 뿐이에요. 요번에 연습을 같이 했지만, 거울을 봐야 세월을 느끼지 우리끼리 얘기할 땐 그저 그 시절 그대로거든요.”(한)

같은 선생님에게 배웠지만 노선 갈려

1988년 대원외고 같은 반 친구들과. 앞줄 가운데가 유동직, 오른쪽이 한규원. [사진 강태웅]
응답하라 1988.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원외고에 입학해 같은 반 앞뒤자리에 앉은 둘은 금세 절친이 됐다. “늘 붙어 다녔어요. 동직이가 입담이 좋았거든요. 동직이가 얘기를 시작하면 웃다 지쳐 울고 쓰러지는 애들이 많았죠.(웃음) 성악 시작하기 전부터 클래식을 좋아해서 집에서 같이 듣기도 했고요.”(한) “규원이는 원래 학교 행사를 휩쓸 정도로 노래를 잘했어요. 저는 도밍고가 누군지도 규원이 덕에 알았죠. 교과서에 나오는 ‘오 솔레미오’ 정도 알던 시절인데, 규원이가 크로스오버의 원조인 ‘퍼햅스 러브’ 악보를 구해 보더군요. 그때 같이 샀던 LP판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틀어놓고 둘이 따라 부르기도 했죠.”(유)

울림 있는 저음을 타고난 규원과 동직은 각각 교내 합창반과 록밴드 활동을 했는데, 89년 여름 성악을 먼저 시작한 건 규원이었다. “시작은 몹시 낭만적인 영어 과외선생님 때문이었어요.(웃음) ‘너, 하루 한번씩 별을 보니’ ‘광활한 우주에서 티끌만한 지구에 살면서 존재의 가치가 뭐라 생각하니’, 이런 얘길 듣다보니 사춘기 감수성에 입시 공부가 하찮아 보이더군요. 동네 상가에 있던 성악 학원에 무작정 찾아갔고, 나중에 동직이까지 끌고 갔죠.”(한)

Q : 왜 친구까지 포섭했나요.
A : 한: “노래를 해보니 너무 좋은데, 동직이 소리도 좋은 걸 알고 있었거든요. 같이 하고 싶어서 ‘쓸데없는 공부 하지 말고 너도 우주의 진리를 찾으라’고 했죠. 밤에 레슨 끝나고 길에서 누구 성량이 더 큰가 소리도 지르고 했는데, 지금 같으면 경찰이 왔겠죠.(웃음)” A : 유: “법대를 가려고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가 방학 내내 머리 빡빡 밀고 공부만 할 때거든요. 공부가 별로 즐겁지 않던 찰나 꼬임에 넘어간 거죠.(웃음) 레슨을 다니면서도 확신은 없었는데, 우연히 베이스 강병운 선생님의 공연에 가서 오페라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공연 후 로비에 사모님과 팔짱 끼고 나오시는데 그 아우라가 대단하더군요. 도대체 오페라 가수가 뭔데 인간 자체가 저런 강렬한 에너지를 뿜는 건지 궁금했죠.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계기가 뭐든, 결국 이 길을 가게 돼 있었던 거죠.”

Q : 바리톤끼리 경쟁하지 않았나요.
A : 유: “내 목소리를 처음 인정해준 고마운 친구인데요. 집요하게 몇 달을 설득하고, 심지어 제가 가장 좋아하던 산채비빔밥을 사주면서 학원에 끌고 갔으니까요. 그 뒤로 어떤 무대에 서든 지금의 나를 미리 알아봐 준 친구를 늘 고맙게 생각했어요. 물론 중간에 잘 안될 땐 원망도 했지만요.(웃음)” A : 한: “늦게 시작해 완전히 몰입한 상황이라 나 자신을 던져서 열심히 할 뿐이었어요. 집에서 반대하시니 잘못되면 군고구마 장사라도 하겠다고 할 만큼 간절했으니까요. 근데 고3때 갑자기 미국을 가게 되고, 언어 때문에 헤매는 사이 동직이는 서울대에 들어가더군요.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웃음)”
출발점은 같았지만, 노선은 갈렸다. 뉴욕 맨하탄 음대를 나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활동하던 규원은 특이하게 일본에서 음반을 내고 팬덤을 키웠다. “유럽에 데뷔할 무렵 프랑스 보르도에서 공연을 함께 했던 마에스트로 사도 유타카가 저를 일본에 초청했어요. 월드컵 1주년 기념공연에 선 이후 2004년부터 코로나 직전까지 오사카에서 매년 1만명의 합창단이 부르는 베토벤 교향곡 9번 무대에 솔리스트로 섰습니다. 40년 전통의 공연인데 저만 한국인 솔리스트라 주목 받았죠.”(한)

성악, 한국인이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

올해 처음 시도된 세종썸머페스티벌 폐막 공연인 서울시오페라단 ‘카르멘’. [사진 세종문화회관]
낭만적인 충동으로 노래를 시작해 행보도 자유로웠던 친구에 비해, 동직의 발자취는 고전적이다. 서울대 성악과와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악원을 거쳤고, 콩쿠르를 휩쓸다 마에스트로 주빈 메타에게 발탁되어 독일에서 데뷔한 이래 20여년간 유럽에서만 활동했다. “이력서에 보이지 않는 고생도 많이 했어요. 서울대에 악보도 잘 못읽는 상태로 들어왔으니, 동기 중에 저와 비슷한 상태였던 뮤지컬 배우 류정한 형과 실기 꼴찌를 다퉜죠. 죽어라 노력해 결국 수석졸업을 하고 유학을 갔는데, IMF가 터졌네요. 집세를 벌려고 콩쿠르를 전전하다 뮌헨 국립극장 오디션에 초청을 받게 됐죠. 가 보니 거기 음악감독이 주빈 메타더군요. 그렇게 독일 생활을 하게 됐어요.”(유)

Q : K클래식 전성기에 해외 진출 성악가들의 현주소는 어떤가요.
A : 한: “미국 선생님이 제 노래를 처음 들어보고 하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해요. 너 잘하긴 하는데 노래해서 밥 먹고 살기 힘든 거 아느냐더군요. 충격적이었는데, 그 말씀 때문에 열심히 했어요. 콩쿠르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좋은 극장에 들어가도 더 높은 곳으로 가는 출발점일 뿐이거든요. 다른 문화를 표현해야 하는 오페라에서 주역을 따는 게 정말 어려웠는데, 요즘은 많이 좋아졌죠.” A : 유: “성악은 언어가 결부되니 진입장벽이 높지만, 이미 우린 다 뛰어넘었어요. 저는 한국인이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가 반도체와 양궁, 성악이라고 얘기하죠. 유럽에서도 클래식 중에 성악이 가장 대중적인데, 한국인들이 지금 최고 수준 영역의 가장 많은 포션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어느 분야나 정상에 오르기까지 단계를 밟아야 하는 건 똑같고요.”
광장 오페라 ‘카르멘’은 70분짜리 압축판이다. 생략되는 장면도 있고 마이크를 쓰는 등 정통 오페라의 맛은 희석되지만, 고급예술의 최고봉인 오페라를 누구나 접근 가능한 광장에서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무대로 꾸민다는 데 의의가 있다.

Q : 야외 오페라는 성악가에게 부담일텐데.
A : 유: “호기심이 많은 편이에요. 정해져 있는 것을 되풀이하는 오페라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으려면 새로운 시각으로 노래해야 하죠. 야외 오페라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일이니 재밌는 일입니다.” A : 한: “닫혀 있는 공간에서 공간의 울림이 주는 예술적 효과가 있는 장르인데, 야외에서 기계의 도움을 받아 소리를 전달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한 분도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선 오픈 마인드여야 살아남을 수 있죠.(웃음)”

Q : 에스카미요는 보기 드물게 테너보다 멋진 바리톤이죠.
A : 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랄까요. 분량은 많지 않은데 관객이 좋아하는 꿀단지로 보이겠지만 사실 부르기는 어려워요. 저음부터 고음까지 다 잘 나야 하죠. 커리어 초기 아주 큰 극장에서 다른 역을 할 때 엄청 잘 나가던 베이스가 에스카미요를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됐는지 우는 걸 봤어요. 그만큼 까다로운 역할이에요.” A : 유: “2003년쯤 처음 할 때 저를 가르친 코치가 ‘비제가 3명의 가수를 놓고 작곡한 것 같다’고 했었죠. ‘투우사의 노래’는 고음도 잘 내는 베이스가, ‘결투 이중창’은 전형적인 바리톤이, ‘사랑의 2중창’은 아주 예쁜 바리톤이 불러야 한다고요. 세 곡이 음역대가 다 다르다는 얘기죠. 늘 3인분 부르는 각오로 합니다.(웃음)”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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