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지 않는 이 도시 전체가 ‘기억박물관’

한경환 2023. 9. 2.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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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 1·2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 1·2
장남주 지음
푸른역사

베를린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일약 세계적 관광지가 됐다. 동서독 분단 40여 년 동안 동독 내 서독 영토였던 서베를린은 외부 세계에서 접근이 불편했고, 공산 진영인 동베를린으로의 여행도 자유롭지 못했다.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 베를린은 오랜 재건·복구 작업 끝에 정비가 상당히 진행됐으며 지금은 독일뿐만 아니라 서유럽, 나아가 전체 유럽의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베를린으로 가는 항공 직항편이 없지만 베를린을 관광하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을 비롯해 연방하원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분데스탁(옛 제국의회), 운터덴린덴가의 유서 깊은 훔볼트대학, 베를리너돔, 무제움인젤(박물관섬), 쿠담 등 다양한 관광지들을 자랑하고 있다.

베를린의 대표적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에 과거 나치의 강제수용소 정문마다 걸려 있던 문구(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를 빛으로 투사한 모습. 1997년 예술가 호하이젤이 ‘독일인들의 문’이란 이름으로 선보인 조명 작품이다. [사진 장남주]
그런데 이 책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은 베를린을 ‘기억문화’의 세계 수도로 칭송한다. 국가사회주의 나치의 반인륜적 독재와 광란의 흔적들, 엄혹한 동서냉전 시절 대결의 현장, 역사적인 독일 재통일과 그 이후 눈부신 통합 과정 등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하고 반성하고 발전시키려는 치밀한 계획과 실천의 노력들이 도시에 촘촘하게 새겨지고 있다고 전한다. 개중에는 거창한 기념관이나 기념물도 많지만 이름 모를 어느 광장 바닥이나 길모퉁이, 숲 등 무심코 지나면 잘 마주치지 못할 곳에도 기억의 징표들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도시 전체가 기억문화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베를린 지역인 그루네발트역 17번 선로에는 자작나무들이 깔려 있다. 악명 높은 유대인 강제수용소가 있었던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지역에서 자라던 자작나무들을 옮겨 심은 것들이다. 나치 시절 그루네발트역에서만 1만7000명이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이송됐다. 1945년 3월 27일 마지막 열차가 테레지엔슈타트로 떠나기까지, 베를린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루네발트역 한 곳만으로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모아비트역(2017년 69번 선로의 일부 옛 역 부지에 재현)과 안할터역까지 동원됐다. 독일철도(DB)는 후일 나치에 부역한 역사를 사과하며 박물관에 그 역사를 전시하고 강제노역 배상기금 조성에 참여했으며, 그루네발트역에 ‘선로17’ 기념 조형물을 기증하고 관련 전시회를 개최했다. 늘 그렇듯이 반성이 오랜 기다림보다 결코 빠르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제대로 반성하고 기억하는 문화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도심 운터덴린덴의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옆 베벨광장에서는 히틀러 나치 집권 때인 1933년 5월 10일 ‘비(非)독일정신’으로 낙인 찍힌 수만 권의 책들이 불태워졌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책들이 독일 내 22개 도시에서 연기로 사라진 ‘분서 만행’의 한 장면이었다. 베벨광장에는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분서 조형물이 설치돼 있으며 “책을 불사르는 곳에서 결국 인간도 불태워질 것”이라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을 새긴 동판이 있다.

1990년 독일 통일과 함께 기억문화운동은 더욱 세차게 확장됐다. ‘독일 전체가 추모관’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으며 베를린은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추모공간 도시로 유명하다. 집시 ‘신티와 로마’ 희생자 추모 조형물, 우생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쓸모없다는 이유로 살해된 안락사 피해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T4 액션’ 추모 공간, 동성애자 희생자 추모비 등이 브란덴부르크문과 분데스탁 인근에 설치돼 있다.

전체 두 권으로 출간된 책 2권에는 베를린장벽 건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변혁을 내세운 68운동, 동독에서의 89평화혁명과 장벽 붕괴, 그 이후 통일 30여 년의 갈등과 통합의 현장들이 소개돼 있다. 예컨대 서베를린 슈판다우 치타델레에는 통독 후 머리가 분해돼 쇠사슬에 달린 채 사라졌다가 다시 복원된 레닌 석상이 전시돼 있다.

옛 프로이센의 왕궁이었던 베를린성은 동독 시절 철거됐는데 이 자리에는 국가평의회와 외교부 청사가 건설됐으며 1970년대엔 동독을 대표하는 건물인 공화국궁전이 들어섰다. 독일 통일 이후 많은 반대와 숱한 논란 끝에 철거의 운명을 맞은 공화국궁전은 지금 박물관 성격의 훔볼트포럼으로 재탄생했다.

동서 냉전의 산물인 베를린장벽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야외 장벽미술관인 이스트사이드갤러리 등 일부는 남아 있다. 동독 국경경비대 시설물이 있었던 중앙역 인근의 ‘가라앉는 장벽’, 베르나우어슈트라세에 들어선 베를린장벽 기념관 등은 또 다른 기억문화의 살아 있는 현장들이다.

오는 10월 3일이면 독일 통일은 33주년을 맞게 된다. 냉전과 통일의 최전선이었던 베를린은 지금도 새로운 기억의 역사를 도시 전체에 아로새기고 있다. 더 많은 기억과 더 많은 반성은 독일과 베를린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밝고 더 이성적인 미래로 안내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그들로부터 기억문화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다. 자유와 평화, 인권, 평등, 정의, 통합의 메시지를 제대로 기억하는 법과 그 정신을 따라가 보자.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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